부푼 꿈을 안고 수습기자로 출근했지만 현실은 팍팍 했습니다. 동네 형님 찬스로 무임승차한 경북여상에서는 한 달 월급이 그 때 돈으로 3만 원 이상이어서 부족한 줄 몰랐는데 어려운 채용 시험에 합격해서 정식으로 입사한 언론사에서는 월급이 그야말로 쥐꼬리만 했습니다. 수습기간 석 달은 아예 월급을 받을 수 없었지요. 왜 월급을 안 주는지 궁금해서 선배 기자에게 살짝 물어보면 붉은 줄이 선명하게 그어진 프레스 카드를 흔들며 싱긋 웃기만 할 뿐 이었습니다. 기자증을 가지고 알아서 먹고 살라는 의미로 받아들인 위인은 큰 실망감을 안아야 했지요.
월급은 박봉이었지만 하고 싶은 일이었기에 기자의 눈으로 적극적으로 세상 곳곳을 들여 다 보기 시작할 때쯤 레이다에 취재거리가 들어왔습니다. 당시 신암동에 있는 대형 음식점에서 음식을 먹은 사람들이 복통과 설사를 호소하고 있어서 집단 식중독이 의심된다는 제보를 받았습니다. 취재를 거쳐 대형 음식점의 위생 문제를 고발하는 단독 기사를 송고해서 지면으로 보도가 됐습니다. (당시 기사작성은 펜으로 원고지에 썼으니 나도 단독 보도에 덜 뜬 마음으로 원고지를 채우는데 기여 했습니다.) 특종 했다고 칭찬을 들을 줄 알았는데 웬걸 회사가 난리가 났습니다. 이 음식점 주인이 대구일보 사장과 절친한 친구였던 거죠. 사장이 방방 뛰고 난리를 치니까 당시 사회부 데스크는 위인에게 영천 주재 기자로 잠시 나갔다가 다시 복귀하라고 권유를 했습니다. 위인은 이 권유를 받아들여 영천으로 짐을 싸들고 내려간 것이 결국 고향에 평생 눌러 앉게 됐습니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은 영천에서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영천 주재 기자를 하면서도 날카로운 특종 기자의 면모는 늘 유지되고 있었지요. 한국 전쟁이 끝나고 영천에는 외곽지 야산 곳곳에 창고를 지어서 실탄과 포탄 등을 저장하는 탄약 창고가 즐비했습니다. 지금도 경부고속도로 영천 IC 부근 야산에는 탄약 저장 창고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탄약 창고를 관리하는 대규모 부대가 영천에 있었는데 군수사령부 산하 ‘052 탄약창’이라는 부대였습니다. 여기 소속된 부대원들이 각종 포탄의 화약을 제거하고 껍질인 포탄의 탄피를 외부에 몰래 팔아서 수익을 챙기는 충격적인 검은 거래가 이뤄지고 있음을 안 위인이 이 사실을 보도해 전국적인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때가 1970년인데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놋쇠와 철, 구리로 만든 포탄의 탄피는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던 시절이었습니다. 소령 계급의 부대장이 그때 돈으로 5만원을 가지고 와서 입막음을 시도했지만 위인은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결국 위인의 보도로 경찰과 헌병대의 대대적인 수사가 벌어졌고 부대장은 옷을 벗었습니다.
대구에서 이름을 날린 주먹 명성은 영천에서 기자로 터전을 잡는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위인이 영천으로 내려 온 해, 영천 지역에도 폭력배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고 이들이 운영하는 야간 업소가 각종 불법을 자행해 사회 문제가 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드나들며 춤바람 난 가정주부가 많아서 사회적 질타의 대상이 되고 있었지만 폭력배들의 보복이 두려워서 아무도 대놓고 지적을 못하고 있었지요. 불의를 못 참는 위인이 결국 불법 온상이 되고 있는 이 업소를 고발하는 기사를 지면에 실었고 경찰 단속이 이어졌습니다. 막대한 피해를 본 폭력배들이 우리는 무엇을 먹고 사느냐고 항의를 했고 급기야 10여명의 폭력배들이 위인을 금호강변으로 불러내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벌어졌지요.
“왜 이러느냐? 너희들이 원하는 것이 뭐냐?”
“영천에서 서로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영천 사회를 정화시키려면 내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 한다”
“뭐라고? 호된 맛을 좀 볼래?”
순간 주먹이 날아왔고 본능적으로 피하면서 날린 주먹에 상대는 쓰러졌습니다. 폭력배들이 위인의 주먹 실력을 알아보고 위인도 잘 아는 대구지역 폭력배 이름을 대며 잘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위인의 대답을 듣고 뒤늦게 위인을 알아본 폭력배들은 이 일을 계기로 이후에는 위인을 늘 깍듯하게 대우를 했었지요.
위인과 함께 언론인으로 당시를 함께 한 동료 가운데 현재 살아계신 분들은 위인에 대해 기자로서의 자질에 대해 서로 엇갈린 평을 내놓고 있습니다.
“이 선배님이 해직 뒤에 복직을 해서 본사에 근무할 때 선배님 뒤를 이어 대구일보 영천 주재 기자를 했는데 그 전에도 다른 신문사에 근무하면서 이 선배님을 알고 있었어. 선배님은 한마디로 청렴하고 강직한데다 대범했지. 취재를 하더라도 사소한 것에는 관심이 없고 큼지막한 사건, 반향이 큰 사건들을 취재하고 기사화한 것으로 기억해.”
- 장병욱 당시 대구일보 영천 주재 기자
“이 기자하고는 연배가 비슷해서 친구처럼 어울려서 지냈는데 이 기자는 바둑 두기를 좋아해서 늘 사무실에 틀어 박혀서 바둑만 뒀고 글도 별로 안 썼어. 반면에 나는 너무 비판하고 고발하는 기사를 마구 써서 지역에서 인심을 잃었지만 이 기자는 인심도 크게 잃지 않았지.”
-권주영 당시 매일신문 영천 주재 기자
기자 생활을 같이 했던 동료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위인은 바지런하게 현장을 누비며 취재를 하고 보도하는 스타일이라기보다는 사소한 것은 눈길을 주지 않고 1면 톱을 장식할 큰 사건을 노리다 한 번씩 특종을 터트리는 기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