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주당은 신익희·조병옥 선생이 주도해 1955년 창당한 민주당을 그 기원으로 한다고 말한다.
제4대 국회의원(당시 민의원) 선거가 1958년 5월에 실시되었고, 그때 처음으로 민주당이란 이름으로 후보를 내세웠으니 1955년이 우리 민주당의 시작이라 말하는 데 큰 이견이 있을 수는 없다.
따라서 조병옥·신익희·윤보선·박순천 등을, 우리 민주당의 1세대 정치인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 1세대 민주당은 오래가지 못했고 뚜렷한 정치이념이 없었기에, 현 민주당과 적통성을 주장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 않나 싶다.
이승만 하야 후 민주당 소속으로 윤보선이 대통령이 되었으나, 박정희의 5.16군사정변으로 민주당은 해산되었고, 이후 1967년 신민당이 창당하여 그 계보를 이었다고 말한다.
2세대 민주당은, 1967년 창당된 신민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신민당이 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며, 지금까지 민주당의 정통성을 이어오면서 본격적인 정당정치를 실현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 정당사에서 2세대 민주당만큼 민주당이 국민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고 인정받게 되었던 적은 없었고, 그런 민주당으로 견인한 주역이 김대중·김영삼 이 두 분이란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데 국민은 왜 당시 민주당을 지지하고 인정했었을까?
어쩌면 이 화두가 우리 민주당이 국민 지지를 받아 집권당이 되고, 우리 민주당 당원이 스스로에게 떳떳해질 수 있는 지름길이 될 것이다.
5.16군사정변으로 국회가 해산되고 1967년 신민당 창당 이전까지, 대한민국은 정권만 존재했을 뿐 정치는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흔히 북한으로 표현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지탱하는 정당인 조선로동당을 두고, 제대로 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런 북한에 정치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와 마찬가지 이유다.
정당의 개념은 단순하다.
같은 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사람이 모인 결사체이며, 정당의 존재 이유와 목적은 정권 쟁취다.
1967년 창당한 신민당은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하고, 민주당이 정권을 쟁취하기 위하여 당내 투쟁조차 서슴지 않았던 정당이다.
신민당을 대표하는 정치인을 꼽으라면 40대 기수론을 표방하며 화려하게 비상한 김대중·김영삼이라 말할 수 있고, 이 두 사람은 군사 독재정권 치하에서 우리 국민에게는 희망이자 위안의 상징이었다.
이 40대 기수론이 국민의 열렬한 환호와 지지는, 이 땅에서 1세대 정치인이 역사의 뒤안길로 완전히 사라지는 계기가 되었다.
유진산·윤보선·이범석·백낙준·양일동·유진오 등이, 바로 이 시기에 우리 국민 시야에서 사라진 인물들이다.
2009년 서거하신 김대중 대통령님을 아직 수많은 국민이 기억하는 점을 생각한다면, 저들 1세대 민주당 지도자들은 너무나 쉽게 국민 기억에서 잊혀졌다.
아니 동시대를 살면서 정치적 동지이자 정적(政敵)이라 말할 수 있는 김영삼 또한 마찬가지이고, 김영삼 또한 시간이 조금만 더 흐르면 유진산·윤보선 등과 비슷한 인물로 치부될 것이다.
동시대에서 똑같이 박정희 군사 독재정권에 저항하고 대통령 자리조차 14·15대 대통령으로 배턴 터치한, 그러면서도 정치적으로 훨씬 더 화려하게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김영삼이, 왜 김대중 대통령님 이름보다 이렇게 빨리 잊히고 있을까?
바로 그가 보여준 정치행적 때문일 것이다.
1954년 초선의원으로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김영삼은, 김대중·이철승 등과 함께 1970년대 초반 40대 기수론을 외치면서 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할 대항마로 부상했다.
김대중 대통령님 역시 만 46세의 나이로 제7대 대통령 선거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서, 박정희보다 채 95만 표 모자란 득표로 박정희를 깜짝 놀라게 하는 저력을 보여주었다.
제7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박정희는 직선제를 포기하고 이른바 10월 유신이라는 헌법 개정을 통해, 이른바 통일주체국민회의라는 이름의 반헌법적 기구를 만들어 체육관 선거를 획책했다.
그때부터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의 민주화 투쟁이 시작되었고, 두 사람의 민주화 투쟁 동지로서 삶은 1990년 3당 야합 직전까지 이어졌다.
김대중·김영삼 이 두 사람의 역사적 평가가 갈린 지점이 바로, 1990년 1월 민정당·통일민주당·민주공화당 이 세 당이 밀실 야합하여 합당을 추진한 때다.
김영삼의 추잡한 대권욕이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화 발걸음을 한 걸음 더 늦춘 일임과 동시에, 대한민국 국민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란 개념을 희미하게 만든 것이다.
그랬기에 우리 국민은 진정한 민주주의 정부로의 정권교체를, 문민정부를 자처한 김영삼의 14대 대통령 당선이 아니라 김대중 대통령님께서 당선된 15대 대통령 선거 결과로 인식하는 것이다.
김대중·김영삼 두 사람의 삶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김영삼은 출생하면서부터 정치를 마감하는 순간까지 귀공자로서 삶을 살았지만, 김대중 대통령님 생애는 개인적으로 자수성가를 이룬 사업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도전과 투쟁의 상징이었던 인물이다.
냉혹하고 차가운 겨울바람을 이겨낸 인동초 같은 삶, 그게 바로 정치인 김대중의 삶이었다.
김대중 대통령님 삶은 파란만장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다.
박정희 정권 당시 중앙정보부에 의한 암살 시도로 의심되던 1971년 무안에서 발생한 교통사고 그리고 일본에서의 납치 사건, 이어진 투옥과 타의에 의한 80년대 중반의 망명 등을 생각하면 그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이에 반해 정치인 김영삼의 삶은 평탄함 그 자체였다.
1969년 6월에 발생한 질산 투척 사건을 제외하고는 희한하게도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을 지나오면서도, 딱히 탄압의 대상이었다는 사건과 이미지는 없었다.
심지어 12.12 군사 반란으로 정국을 장악한 신군부가 5.17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정치인이 체포되어 구속되었다.
심지어 김대중에게는 간첩 혐의를 덧씌워 사형선고가 내려졌음에도, 그 상황에서도 김영삼에게는 가택연금이라는 상대적으로 지극히도 가벼운 처분에 그쳤다.
그랬기에 내 개인적으로는 김영삼이 진짜 민주당 아니 야권 지도자가 아니라, 혹시 민주당에 뿌리내린 프락치가 아니었나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1987년 이 땅에는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는 국민의 몸부림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직선제 개헌을 쟁취할 수 있었다.
비록 양김(兩金)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노태우가 당선되긴 했지만, 이듬해인 1988년 실시된 제13대 국회의원 총선거 결과는 국민의 힘으로 얼마든지 정권교체가 가능하다는 희망을 안겼다.
문제는 이 13대 총선이 야권의 압승으로 끝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노태우와 권력욕에 눈이 먼 김영삼의 욕심이 서로 맞물려,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민의를 배신하고 야합을 결의했다는 점이다.
김영삼은 민주 정부 수립을 기대하던 국민을 배신했을 뿐 아니라, 우리 국민이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라는 논리조차 희미하게 만드는 죄를 저질렀다.
김영삼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문민정부’라 자처했지만, 김영삼의 집권은 소속 정당과 무관하게 평화적 정권교체와는 거리가 멀다.
1990년 1월 3당 야합 당시 보인 김영삼의 정치 행보는, 박정희·전두환 군사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던 민주 진영을 대표하는 정치인이자 투사라는 이미지를 스스로 내팽개친 행위였다.
하지만 김대중은 갖은 시련과 목숨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지켰기에, 우리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내고 쟁취한 지도자로 각인된 것이다.
그만큼 정치인에게 소신과 명분은 중요한 법이고, 이런 소신과 명분을 저버리는 순간 정치인이 아닌 협잡꾼 또는 양아치로 전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