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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울산·경남권
[부산] 부산에서 민주당원으로 산다는 것은 이재호님 -4편
평당원이야기
2024-12-25

부산 민주당 & 김정길(1)

부산은 야구 도시 야도(野都)이기도 하지만, 정치적으로도 야성이 강한 야당이 득세하던 야도(野都)라 불렸던 시절이 있었다.

3당 야합 이전까지만 해도, 부산은 야도(野都)라 불리기에 한 점 부끄럽지 않았던 도시다.

전두환이 집권하던 12대 총선 당시에 부산이 차지하는 의석이 12석이었지만, 집권당이었던 민정당 소속은 겨우 3석을 확보하는 데 그쳤다. 

4년 후에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그 정도가 더욱더 심해졌다. 

13대 총선에서 민정당은, 금정구 김진재 한 사람만 유일하게 당선되고 나머지 14개 선거구에서 완전히 전멸했다.

그런 이유로 우리 국민은, 부산을 야도(野都)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실상은 부산 사람의 정치적 성향이 야성향(野性向)이어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을 맹종하고 따랐던 결과였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바로 1990년 1월에 전격 추진된 3당 야합이 바로 그 증거다.

만일 부산 시민의 정치적 성향이 정말 야성(野性向)이라면, 3당 야합 이후에도 민주당을 향한 지지가 여전했어야 한다.

그런데 3당 야합 이후 치러진 14대 국회의원 총선거 이후에 치러진 부산 선거는,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보수 정당 지지로 드러났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당 소속으로 단 한 명만 당선되었는데, 당선자인 조경태 또한 당을 지지했다기보다는 조경태 한 개인을 향한 지지 결과라 할 수 있다.

조경태 의원 지역구에서는 17대 총선 이후 2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 경태’란 표현이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 증거라고 할 것이다. 

조경태 의원 건은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조경태의 민주당 탈당은 당시 친노라 자처하던 자들의 어리석은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부산 민주당은, 3당 야합 이후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부산 민주당을 고사시킨 주범은 김영삼이었고, 김영삼으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믿었던 김정길이 3당 야합 반대를 앞장서서 반대했으니, 김영삼으로서는 자신의 대권가도에 똥물을 뿌린 김정길에 대한 인간적 배신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길을 죽이기 위해, 부산을 더 철저히 짓밟았을 것이다.

김영삼과 김정길은 같은 동네에 살던 초등학교 선후배 사이이자, 두 양반의 선친(先親) 또한 한동네서 친구 사이로 지내던 관계였다. 

김영삼은 가신그룹에 속하지도 않은, 고향 후배인 김정길을 알게 모르게 챙겼었다. 

12대 총선 당시에도 서석재에 밀린 박찬종을 중구·동구·영도구에 공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김정길에게 선출직이 아닌 전국구 상위 순번을 제안했었다.

하지만 김정길은 ‘당선되어서 돌아오겠다’라면서 김영삼의 제안을 거절하고, 민한당 공천을 받아 당선된 후 민한당 탈당을 선도했었다.

김영삼이 김정길에게 공을 들인 건, 12대 총선 당시 일에서 그치지 않는다.

5공 청문회 당시에도 김정길은 5공 청문회 청문위원으로 나서고 싶어 했지만, 당시 원내총무였던 최형우 의원 정치력과 토론 능력을 우려한 김영삼이 김정길에게 최형우 총무를 대신한 역할을 주문했었다.

그 이유로 김정길은 당시 5공 비리에 관련된 자료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었음에도, 5공 청문회 청문위원 대신에 원내 수석 부총무로 임명되었다.

“YS가 서운하지는 않으셨습니까?”
“그 양반도 날 챙겨주려고 했던 일이었는데, 서운해할 이유가 있나?”

지난 9월엔가 마포에서, 김정길 전 장관을 만나서 했던 대화 내용 중 일부다.

12대 총선 당시 공천 문제도 그렇고, 노무현을 청문회 스타로 만들었던 5공 청문회 또한 김정길이 스타 국회의원이 될 기회를 빼앗았다는 생각에서다.

위에 언급한 두 가지 에피소드는, 김영삼이 싹수가 보이는 고향 후배 김정길을 챙겨준다는 차원에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국민에게 정치인 김정길이란 이름을, 진짜 impact 있게 과시할 기회를 박탈한 결과였기에 했던 질문이었다. 

아무튼 이런 김영삼과 김정길 두 사람 관계는, 1990년 1월 3당 야합을 기점으로 180도 돌변하게 된다.

김영삼 생각에 김정길은 당연히 따라나서야 할 후배 정치인, 아니 다른 의원을 설득해서 3당 야합 대열에 합류하게 설득해야 할 사람이 김정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가만히 있으면서 떨어질 콩고물만 계산하고 있는 상황에서, 가장 믿었던 김정길이 혼자 나서서 반기를 드니 어떻게 분노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간 싹수 있는 고향 후배라는 생각에 자기 딴에는 열심히 챙겨줬는데, 그런 후배가 평생 대업인 대통령으로 가는 길에 초를 치니, 김영삼으로서는 당연히 화도 나고 살 떨리는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때부터 김정길 정치 인생은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1990년 3당 야합 이후 출마한 7차례 선거에서 7번 낙선한 그 사실만으로도, 김정길 앞에 어떤 정치적 고난이 놓여있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14대 총선, 14대 보궐선거, 15대 총선, 16대 총선, 17대 총선, 제5회 지방선거, 19대 총선, 이렇게 총 7번 출마해서 7번 낙선하는 낙선 전문 거사가 바로 김정길이다. (18대 총선은 김정길이 대한체육회장 선거에 출마하면서, 대한체육회장 임기 중에는 그 어떤 정치활동도 하지 않기로 약속했기에 출마할 수 없었다.)

김정길 정치 인생이 가시밭길이 된 이면에는, 김정길의 지역구가 부산 하필이면 부산에서도 영도구란 점이 크게 작용했다.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김영삼은 경남 거제 장목면에서 태어나 부산을 정치적 고향으로 삼은 사람이다. 

김정길 또한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경남 거제 장목면에서 태어나 부산 중·동·영도구에서 국회의원 배지를 달고, 소선거구제로 선거구제 개편 이후 17대 총선까지 영도구에서 출마를 고집했었다.

같은 부산이 정치적 기반이라는 점만으로도 김영삼의 핍박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을 텐데, 김정길이 출마한 지역이 영도구란 점이 김정길에겐 악재로 작용했다.

김정길이 오매불망 사모하는 영도는, 부산에서도 참 특별한 지역이다.

6.25 남북전쟁 당시 전국에서 피란민이 몰려와 급격히 팽창된 지역이고, 덕분에 토착민 비율이 극히 낮은 지역이다. 

그랬기에 지역 토착민을 보호하기 위해서인지 ‘봉래산(고갈산) 할매’ 전설마저 전해져 오고, 현재도 사당을 지어 ‘봉래산 할매’를 모시고 있다.

그만큼 영도 토착민의 피해 의식이 강했기에, 외지인과 토착민 사이 또 외지인도 출신 지역에 따른 차별이 대단한 지역이다.

지금도 영도에는 ‘제주 향우회’ ‘거제 향우회’ ‘호남 향우회’가 지역 여론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선거가 가까워지면 출마 후보들은 향우회에 줄을 대려고 골몰한다.

그랬기에 부산남고를 졸업한 서울대 출신으로, 세 곳 향우회 중 향우회 한 군데의 전폭적인 지지만 받으면 무조건 당선이라는 말마저 나올 정도다. 

지금은 인구 분포가 어떻게 변했는지 모르겠지만, 1990년대 당시만 해도 신기하게도 ‘제주’ ‘호남’ ‘거제’ 이 세 향우회가 영도 전체 인구 중 각 30% 정도를 차지했었다.

문제는 유감스럽게도 김정길은 출신이 김영삼과 같은 거제인 탓에, 거제 향우회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처지라는 점이다.

그렇다고 영도 사람이 선호하는 부산남고를 졸업한 서울대 출신도 아니었으니, 김정길이 기댈만한 구석은 없다시피 했다.

물론 김정길 부인이 전남 고흥 출신이라 호남 향우회에서 어느 정도 도움을 주긴 했지만, 그들 역시 김정길이 거제 출신이라는 점과 부산이라는 지역 정서상 호남 출신인 그들이 적극적으로 나설 환경이 되지 못했었다. 

심지어 김정길의 부인이 전남 고흥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호남 출신 유권자가 아닌 나머지 유권자 대부분에게 배척당하기까지 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14대 총선 초반 분위기는, 김정길 3선이 그리 어렵지 않을 분위기였다.

하지만 선거운동이 개시된 초반 김영삼이 영도에 들어왔다 간 이후, 영도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김정길은 배신자’라는 소문이 급격히 퍼졌고, 심지어 경남고 출신인 정치신인 김형오가 부산남고 출신이라는 헛소문마저 돌았다.

김영삼은 14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에 세 번이나 영도를 휘저었고, 그 결과 김정길은 정치신인 김형오에게 41:25란 스코어로 참패했다.

김정길의 앞길에 가시밭길이 깔린 시작이고, 김정길은 그걸 헤쳐가기 위해 이후 20년 넘는 세월을 싸우고 또 싸웠다.

사실 김영삼의 3당 야합 합류는, 김정길에게만 악재로 작용한 게 아니었다.

다른 지역이야 김영삼이 나서서 설쳐대지 않아도 민자당에 위협될 만한 후보가 없었기에, 김정길만 죽어라 짓밟았던 것뿐이었다.

하지만 부산 전체 분위기를 이끌어야 할 김정길이 김영삼에게 짓밟히는 처지니, 자연스럽게 부산 전체 분위기 또한 민자당 일색인 도시가 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런 분위기 속에서도, 반전의 기회는 찾아왔다.

바로 부산 출신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열린우리당이 집권당이었던 17대 국회의원 총선거가 반전의 기회였다. 

선거 초반만 해도 김정길은 민자당 후보인 김형오에게 최소 11 최대 21% 이상의 우위를 지키고 있었고, 부산 대부분 선거구가 우리 부산에서 민주당이 다시 기사회생할 기회라 환호했었다.

하지만 그런 환호와 기대는 당시 당 의장이었던 정동영의, ‘노인 폄훼 발언’으로 인해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지금도 당시 분위기가 생생하다.

비린내 풍기는 생선 씻은 물로 질퍽거리는 청학시장 생선가게 앞에 꿇어앉아 김정길을 도와달라 읍소했지만, 청학동 시장 상인들의 냉소 어린 눈빛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 같은 늙은이는, 투표장에 오지도 말라면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구하는 말 말고는 다른 할 말이 없었고, 정말 우리는 울먹거리면서 청학시장과 남항시장 등 영도구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면서 용서를 빌었다.

그랬음에도 선거 결과는 3.13% 채 3,000표 차이도 나지 않는 패배로 드러났다.

그렇게 12년 만에 화려한 부활을 꿈꾸었던, 김정길을 비롯한 부산 민주당 후보의 처절한 투쟁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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