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으로 1984년 11월 말에 신한민주당에 입당했으니 민주당 당적으로 살아온 세월이, 올해로 40년을 넘겨 41년째로 접어든다.
부산에서 민주당 당원으로 살아가면서 또 한 정치인을 30년 가까이 모시면서, 편하고 좋았던 날보다는 힘겹고 눈물 나던 날이 몇 배나 많았던 세월이었다.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의 밀실 야합 결과인 3당 야합.
그 3당 야합만 없었더라면 또 내가 모시던 정치인이 김정길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더라면, 내 정치판에서의 삶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1990년 3당 야합 당시 분위기는, 김영삼을 따라가는 일이 당연시되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김정길 의원이 고민하던 순간, 나만 아니라 지구당 식구 전부는 영감이 3당 야합 대열에 동참하기를 은연중 기대했었다.
민자당에 합류하면 더는 돈 문제로 곤란을 겪을 일이 없을 거라는, 지극히 단순하고도 단편적인 이유에서다.
1984년 대학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찾았던 지구당 사무실은, 영도지구당이 아니라 박관용 의원이 위원장으로 있던 동래지구당이었다.
문제는 12대 총선을 치르면서 선거운동 기간에 내놓았던 잔머리의 결과가 너무 좋았던 탓에, 그게 내 목을 옭매는 동아줄이 되었다는 점이다.
선거 승리 공로의 대가가 박수가 아닌 견제와 따돌림으로 돌아왔고, 그 와중에 선거구제 개편이 시도되자 결국 집이 있는 지역인 동래을 지구당으로 쫓겨나다시피 했다.
하지만 동래(을) 지구당위원장으로 내정된 C 의원은, 정치에 일천(日淺)한 나조차도 인정할 수 없었던 양반이었다.
그랬기에 나는 C 의원 사무실로의 출근을 거부했고, 선거 준비에 다급했던 C 의원의 사람이 집까지 찾아오는 등으로 귀찮게 했었다.
그래서 도망쳐야겠다고 판단하고 어디로 갈 것인가를 고민하다가, 영도의 김정길이란 이름의 초선의원을 발견했다.
그렇게 김정길 의원과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그때부터 영도지구당 당원으로서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영도지구당에서도 적응이 쉽지 않았다.
단지 선거를 돕겠다는 생각에서 그곳까지 찾아갔을 뿐인데, 영도지구당 당직자와 당원들이 색안경을 끼고 나를 대한 때문이다.
물론 내가 처한 상황을 생각하면 의심받을 만하긴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지하철도 없던 시절이라, 집에서 영도까지 가려면 버스로 1시간이나 가야 했다.
그러니 돈도 주지 않는 야당에 찾아와 선거를 돕겠다니, 프락치가 아닌가 하고 의심받기 딱 좋았고 결국 프락치로 몰리기까지 했다.
대학 시절 우암동에 있는 야학에서 교사로 봉사했는데, 당시 동료 야학교사를 우연히 영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남항동의 한 다방에서 인사와 안부를 나누었고, 그런 모습을 당직자 중 누군가가 목격했던 모양이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동료 야학교사가 당시 민정당 후보로 출마한 안병해 후보의 최측근이었다.
나야 모르고 반가운 마음에 악수하고 다방에까지 가서 이야기를 나눴었지만, 그 친구가 누군지 아는 당직자 눈에는 내가 프락치라고 오인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어쨌든지 간에 그런 우여곡절을 거친 끝에 나는 영도지구당에 둥지를 틀었고, 그날 이후 27년 넘는 세월을 김정길이라는 정치인과 함께 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