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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권
[경북] 온 몸으로 실천한 정론직필(正論直筆) ‘영남 인동초(忍冬草)’ 이육만님 -6편
평당원이야기
2025-01-09

인혁당, 밀려드는 어두운 그림자 
 

 대구일보가 폐간 될 당시 세 아이의 아버지였던 위인은 생계를 위해 필사적으로 새 직장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서민들과 영세 상공인들에게 돈을 빌려주는 일종의 사 금융 회사인 ‘무진(無盡)회사’들의 영업이 성황을 이루고 있을 때였습니다. 업계 1위는 영천 출신의 사업가인 지종호라는 사람이 운영하던 ‘민생무진’이었습니다. 위인은 대구일보가 폐간되자 이 민생무진의 개발부장을 잠시 맡아 일을 했습니다. 당시 ‘민생무진’이라는 회사는 계열사 13곳을 거느리고 30만 명의 가입자와 500억 원의 예금을 유치한 큰 회사였습니다. 정부가 1972년 사 금융 시장을 제도권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상호신용금고 제도를 도입했고 ‘민생무진’도 ‘민생상호신용금고’로 이름을 바꿨습니다. 하지만 얼마 안 있어 위장 출자한 비리가 드러나자 정부는 ‘민생상호신용금고’와 13개 계열사를 국민은행과 지방은행들이 인수하도록 함에 따라 역사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위인의 손에 있으면서 돈다발을 세는 호강을 누리지 못할 운명임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습니다. 위인은 한 여름 밤의 꿈으로 끝난 민생무진에 대해 이렇게 회고 했습니다.

“계열사가 13개나 되니까 우리는 민생 그룹이라고 불렀어. 한번은 박정희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불러서 방위성금을 내도록 했는데 현대 그룹이 3천만 원 정도 낸다면 민생 그룹은 1억 원을 방위성금으로 낼 만큼 자본력이 막강했었어. 너무 잘 나가니까 기존 재벌들의 견제가 심해지고 해서 결국 반짝하다가 사라지고 말았지.”  
 
 대구일보가 폐간되던 해를 즈음해 위인이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당시 영남일보 영천지사장을 맡고 있던 도예종이었습니다. 도예종은 지하조직인 인혁당 당수로 지목되어 1975년 억울하게 사형을 당했고 2007년 재심을 통해 무죄를 선고 받은 사람입니다. 도예종은 위인보다 열 네 댓살 나이가 많았지만 취미가 바둑으로 서로 같았고 맞수였던 터라 위인과 자주 바둑을 두며 허물없이 지냈지요. 자장면을 시켜서 같이 먹어 가며 바둑을 뒀는데 어떤 날은 하루 종일 바둑을 둘 때도 있었습니다. (이때는 내 역할이 컸지요. 위인이 바둑알을 쥐고 움직이다 몇 번 바둑판에 돌을 떨어뜨린 것을 기억하는지요? 내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거기는 자충수가 될 행마였기 때문입니다.) 도예종은 원체 말이 없고 점잖은 사람이라 그 와는 대화 보다는 바둑으로 수담(手談)을 나누는 사이였습니다. 도예종은 대구에 삼화토건이라는 건설 회사도 하나 운영하고 있었는데 대구일보 폐간으로 일자리를 찾고 있던 위인은 어느 날 도예종에게 건설 회사 일자리를 부탁했고 도예종은 이력서를 하나 써서 대구 남산동 고려다방으로 가지고 오라고 했었지요. 덜 뜬 마음으로 이력서를 가지고 고려다방 부근 길을 걸어가고 있는데 뒤에서 빵빵 하는 경적 소리가 들렸지요. 뒤 돌아 보니 동네 형님인 신진욱 협성재단 이사장이 차를 몰고 가다가 위인을 발견하고 클랙슨을 누른 겁니다. 

“니 어디 가노?”

“예, 누굴 좀 만나러 갑니다”

“내가 영천 금호에 학교 하나 인수했다는 얘기 들었제?”

“예, 알고 있습니다”

 “그럼 아무 말 하지 말고 내일부터 그 학교로 출근해라”            

  신진욱 이사장은 이 말을 남기고 위인이 들고 있던 이력서 봉투를 낚아채듯 들고 사라졌습니다. 위인은 빈손으로 고려다방에서 도예종과 만나 간단한 인사만 나눈 뒤 다음 날부터 금호중고등학교 국사 교사로 출근을 시작하며 경북여상에 이어 협상재단 산하 학교에서 두 번째 교편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2년 뒤 신문지상에 2차 인혁당 사건이 대문 짝 만하게 보도됐고 도예종과 친분이 있었던 위인에게 다시 수사의 칼날이 턱밑 까지 들이 닥치게 됐습니다.

 1964년 박정희 정권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거세지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반정부 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에 들어갔고 중앙정보부는 대규모 지하조직을 적발했다고 발표합니다. 도예종이 인민혁명당을 조직해 국가변란을 기도했다며 언론인과 교수, 학생 등 41명을 검거했는데 이것이 1차 인혁당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도예종은 징역 3년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렀습니다.

 10여년이 흐른 뒤 3선 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유신헌법 제정으로 영구 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 정권은 재야 세력이 100만인 서명운동 등을 벌이며 강력하게 저항하자 대통령 긴급조치를 선포했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민청학련 사건을 수사하면서 인혁당이 배후 조종했다며 도예종 등 23명을 내란예비와 음모 등의 혐의로 다시 기소를 하는데 이를 인혁당 재건위 사건 또는 2차 인혁당 사건이라고 부릅니다. 군법회의에서 도예종 등 8명에 대해 사형이 선고 되었고 대법원 확정 판결이 난지 18시간 만에 8명은 서울구치소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엠네스티는 이를 ‘사법살인’이라며 강하게 규탄 했습니다. 2002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는 이 사건이 고문에 의해 과장, 조작된 것이라고 밝혔고 사법부는 2007년 재심을 통해 사형을 선고 받은 8명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도예종은 대구 계림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귀국해서 경상북도 일대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했습니다. 대구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상주고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1960년 4·19 혁명으로 자치 단체 교육감이 선출직으로 바뀌자 영주 교육감에 출마해서 당선됩니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이 나서 발령이 지체되어 결국 취임하지 못했습니다. 도예종은 4.19 혁명이후 대구와 경북 지역의 진보적 청년층의 리더로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5.16 군사정변 이후에는 수배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는 등 모진 고초를 겪다가 결국에는 지하조직의 당수로 조작되어 사형을 당한, 암울했던 시대가 낳은 희생자이자 풍운아였습니다. 

 8명이 사형 당한 그 무시무시한 2차 인혁당 사건이 터지자 도예종과 친분이 있었던 위인도 무사할 리가 없었지요. 불과 4년 전 있은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의 악몽이 되살아나서 불안에 떨 수밖에 없었습니다. 영천 경찰서에 사흘 간 불려 다니면서 조사가 이어졌고 도예종과 친하게 된 계기와 그동안 나눈 대화 등에 대해 집중적인 조사가 이뤄졌지요. 위인은 도예종과 바둑을 두며 친하게 지냈지만 그가 북한을 추종하는 사람인 줄은 전혀 몰랐고 지하조직에 대해서도 들은 적이 없고 단지 존경했을 뿐이라고 사실 그대로 일관되게 주장했습니다. 더구나 최근 2년 동안은 도예종과 교류가 없었고 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음을 재차 강조했지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가 되는 무수한 조작이 가능하던 야만의 시대였기에 생각지도 못한 고초를 당할 수도 있는 인생의 위기 순간이었습니다. 혐의점을 찾지 못한 수사기관은 결국 위인을 풀어줬고 위인은 또 그렇게 험난한 인생의 파고 한 고비를 넘길 수가 있었습니다.  

 “내가 인혁당 사건에 직접적인 연루는 되지 않았지만 그 사건으로 내 주변에 내가 아는 사람들은 거의 다 잡혀 들어가서 8년씩 살고 나오고 해서 나는 그 사건으로 솔직히 큰 충격을 받았어. 사실 그 사건 이후로 나에 대한 경찰의 감시도 강화돼서 여러모로 많은 괴로움을 받게 됐지”  

 (만일 신진욱 재단이사장이 위인의 손에서 이력서를 낚아챌 때 내가 얼떨결에 힘을 주어 이력서를 움켜쥐었고 고려다방에서 도예종에게 이력서가 그대로 건네져서 그와 계속 인연을 맺고 있었더라면 8명이 사형을 당한 그 암울했던 암흑의 시기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요? 지금 생각해도 온 몸에서 힘이 스르륵 빠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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