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대통령 선거 때 신문기자로 취재를 통해 김대중을 처음 만나게 된 위인은 그의 인품과 그가 제시하는 비전에 흠뻑 빠져서 열렬한 지지자가 됩니다. 선거가 끝나고 자주 만나자던 김대중 당시 후보와의 약속에 따라 위인은 동교동을 방문하거나 그가 전화를 걸어오기도 하는 등 자연스럽게 동교동 식구의 일원이 됐습니다. 그가 가택 연금 중일 때는 사전에 비서진과 연락을 취해 첩보전을 방불케 하는 방문을 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를 기점으로 영남과 호남 사이의 지역감정은 점점 심각한 상황으로 변하고 있었습니다. 정치 위정자들에 의해 선거 공학적 전략의 하나로 짜여 진 프레임이 영남과 호남 사이에 갈등과 불신의, 건널 수 없는 깊은 강을 만들었습니다. 70년대와 80년대 영남에서 김대중은 ‘빨갱이’ 즉 공산주의자로 인식되고 있어서 그 누구도 선뜻 그와 가까이 하려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더구나 김대중과 친하다는 소문이 나면 요시찰 대상이 되어서 늘 감시의 눈길이 따라다녀 굽잡히는 신세가 되기 때문에 더욱 가까이 할 수 없었지요.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도 위인은 당당하게 김대중에 대한 지지를 밝혔고 동교동을 방문해서 그와의 교류를 넓혀 나가고 권노갑, 한화갑 등 이른바 동교동계 가신들과도 친분을 쌓아 갔습니다. 영천 지역 사회에서 위인은 ‘김대중 병 환자’로 불려 졌고 급기야 경찰 당국의 사찰 대상에 오르게 됐습니다.
“그 때는 수시로 동교동에 불려가서 그 분으로부터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교육도 받고 했는데 그는 상대방이 무슨 이야기를 하면 중간에 끊지 않고 일단 다 들어 주고,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어서 참 마음이 편했어. 이런 사람이 빨갱이로 매도되고 사상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몰리고 있는 것이 그 당시에는 너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어.”
이때 위인과 교류를 시작한 동교동계 사람들이 위인에게는 평생 정치적 동지이자 어려운 상황이 올 때 마다 큰 힘이 되어줬습니다. ‘남산의 부장들’이란 책을 쓴 저자 김충식은 동교동계에 대해서 2003년 신동아 1월호에서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었습니다.
‘한국정치사에는 남산 혹은 정보부, 안기부로 불리던 정치공작처가 있었다. 분단 내전 냉전 독재 학생혁명 군사쿠데타라는 특이한 역사가 배태한 제3의 막강 정치집단, 그것은 한국정치에만 존재하는 괴물이자 어두운 유산이었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군사정권의 권력보위 기능을 맡았던 이 무소불위의 남산조직, 거기에 맞섰던 가장 두드러진 대항 세력은 누가 뭐라 해도 단연 동교동이었다.’-출처: <신동아>, 2003년 1월호, 520호, 김충식
71년 대선에서 아깝게 패한 김대중은 박정희의 최대 정적으로 부상하면서 정보기관의 감시가 한층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광주-목포 간 국도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보좌관이 숨지고 김대중은 고관절을 크게 다쳤습니다. 김대중은 다친 다리를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하다 유신헌법이 발효되자 귀국하지 않고 해외에서 반 유신체제 활동을 펼쳐나갑니다. 김대중은 일본 교토에서 한국 정보기관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어서 동해상에서 수장 될 뻔 했다가 129일 만에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이 유명한 김대중 납치 사건입니다.
위인은 가장 존경하는 정치인이 두 번씩이나 죽을 뻔 했다가 살아났다는 소식에 치를 떨었고 배후로 짐작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 온 몸으로 저항하기 시작했습니다. 더구나 위인이 소속된 대구일보도 71년 대선에서 김대중의 유세 전단지를 인쇄해 줬다는 이유로 선거가 끝난 뒤 온갖 탄압을 받다가 결국 폐간됐고 위인은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시대 상황 상 바깥으로 표출할 수 없었던 위인의 저항은 ‘김대중 병’ 가슴앓이로 나타났습니다. 위인이 동교동을 찾아가는 횟수가 늘어나는 등 ‘김대중 병’ 증세가 심해질수록 사법기관의 위인에 대한 감시망도 더욱 촘촘해졌습니다. 위인은 ‘4월 혁명 부상동지회’ 초대 회장을 지낸 안병달, 신민당 유진산 총재 특별보좌역을 역임한 조병환 등 영천 지역 재야인사들을 동교동에 데리고 가서 김대중과 인사를 시키고 동교동계 가솔로 이끌기도 했습니다.
위인이 김대중에 그렇게 매료된 것은 인품과 학식이 훌륭한 점도 있지만 그가 그때 까지 걸어온 길이 위인이 걸어온 길과 비슷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위인은 김대중 보다 15살 어리지만 살아온 환경이나 배경이 여러 면에서 흡사합니다. 이른바 ‘흙수저’로 불리는 가난한 유년기의 공통점을 갖고 있고, 한국전쟁 때 김대중은 출장 갔던 서울에서 직장이 있던 목포까지 걸어오면서 전쟁의 참상을 목격했다면 위인도 의성에서 대구까지 험난한 피난길을 걸었습니다. 김대중과 위인 두 사람 모두 학창시절에 웅변부에서 활동하며 웅변에 탁월한 능력을 보였던 것도 비슷한 점입니다. DJ가 목포일보 사장 겸 기자로 언론인을 잠깐 한 경력도 위인이 대구일보 기자를 한 경력과 유사하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월반과 편입을 통해 마친 것도 두 사람의 공통분모 가운데 하나입니다. 뿐만 아니라 후일 정치인으로 여러 차례 선거에서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신 것도 두 사람이 비슷하다면 비슷한 경력입니다.
김재규가 유신의 심장에 방아쇠를 당긴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정권의 18년 철권통치는 막을 내렸습니다. 김대중을 비롯한 재야 민주화 세력은 ‘서울의 봄’을 맞아 그렇게 기다리고 고대하던 민주화가 이 땅에도 실현될 것으로 보고 꿈에 부풀었지요. 하지만 ‘서울의 봄’은 너무나 짧게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10.26 사건을 수사하던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합동수사본부장이 되어 권력을 장악합니다. 12.12 군사 반란으로 군부까지 장악한 전두환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비상계엄을 확대하고 정권 지속을 위한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나갑니다. 신군부에 대항해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물결은 점점 퍼져 나갔고 급기에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벌어졌고 신군부는 총칼로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신군부는 김대중을 가만두지 않았습니다. 신군부는 그가 북한의 사주를 받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면서 내란음모죄로 체포해서 군사재판에 회부했고 계엄 군사법원은 사형을 선고했습니다. 국제 사회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이 펼쳐지고 신군부에 압박이 가해지자 신군부는 1982년 그에게 형집행정지를 내리고 신병 치료 명분으로 미국으로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서울의 봄’이 좌절되고 정신적 지주였던 DJ가 체포, 사형선고, 미국망명 등으로 탄압을 받게 되자 위인은 이번에는 전두환 신군부를 향해 소리 없는 저항을 이어갑니다. 모든 정치활동이 금지 되고 재야인사들이 투옥되거나 가택연금이 되던 암울한 시절, 위인의 만성적 가슴앓이였던 ‘김대중 병’은 증세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김대중의 미국 망명 이후 늘 비빌 언덕이 되어 주던 그의 빈자리는 위인에게 너무나 큰 상실감과 공허감을 안겨줬습니다. 김대중을 따르던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미행과 감시는 한층 강화되었습니다. 더구나 김대중 추종자 영남권 1호였던 위인은 더욱 고통을 받을 수밖에 없었지요. 위인은 당시 금호중고등학교 교사였는데 매주 주말이면 동교동 178-1 번지의 빈 자택을 찾아 ‘김대중𐩐이희호’ 문패를 쓰다듬으며 울분을 삼키고 줄 담배를 피워댔습니다. 어떤 날은 위인이 서 있었던 주변이 위인이 피우고 버린 담배 공초로 수북이 쌓일 정도였습니다. (이때는 내 속도 위인이 들이마신 담배 연기로 담뱃진이 누렇게 묻어날 정도였습니다.) 동교동 자택을 찾는 빈도가 잦아지다 보니 동교동 순찰을 도는 경찰관들과도 인사를 나누는 친숙한 사이가 됐습니다.
“호남 사람들이야 여기를 자주 찾아오지만 경상도 사람이 여길 찾아오는 것은 당신이 유일합니다. 이 집이 빈 집인 것을 알고 오는 거요?”
“빈집인 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여기 이렇게 오면 집 주인을 만날 수 없어도 마음이 그나마 편해서 오는 겁니다.”
경찰관들은 이해를 못하겠다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면서 특이한 행보를 하는 위인을 ‘김대중 병에 걸린 경상도 사람’으로 불렀습니다. 답답한 마음을 위로라도 받을 양 동교동을 방문하고 돌아오면 어김없이 왜 동교동을 방문했고 누구를 만났는지 캐묻는 경찰서 정보과 전화가 걸려오는 일은 일상이 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