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구속된 이후 미국에 망명한 김대중은 망명지에서 늘 국내 정치의 참여를 위한 귀국 시점을 저울질 하고 있었습니다. 위인도 금호중고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며 주군(主君)의 복귀 이후 역할을 고민하며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휴면기를 갖고 있었지요. 한층 강화된 감시와 미행 속에서 동교동계와 계속 교류를 하며 김대중의 안전한 귀국과 정치 복귀 등을 논의했습니다. 김대중은 1985년 2월,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4일 앞두고 귀국을 감행합니다. 전두환 정권은 그가 귀국하면 교도소에 재수감해서 잔여 형기를 집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었습니다. 2년 전 동병상련의 처지였던 필리핀의 민주투사 ‘베그니노 아키노’가 귀국길에 암살을 당한 사례가 있어서 미국 연방하원 의원 등 저명인사들이 김대중을 공항 입국장 까지 둘러싸다 시피 해서 한국에 도착했고 신군부는 바로 김대중을 가택 연금했습니다.
DJ가 귀국하자 위인도 현실 정치를 시작합니다. 가난한 야당 정치인으로 김대중 만 바라보는 외길 인생이 시작된 것입니다. 갑작스런 그의 귀국으로 얼떨결에 교사 신분을 유지한 채 그해 치러진 12대 총선에서 영천에서 출마한 안병달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습니다.
안병달은 동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다 4.19 혁명 때 시위에 앞장서다 왼쪽 어깨 관통상을 입고 4월 부상혁명동지회를 결성해 이끌었습니다. 그는 5.16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부상혁명동지회 이름으로 지지성명을 내달라는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그는 이 때문에 28년 만에 겨우 4.19 혁명 유공자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던, 뼛속 까지 야당인 영천지역의 대표적인 재야 인사였습니다. 위인이 안병달을 알게 된 것은 대구일보 기자로 여당의 과열 혼탁 선거를 취재했던 1967년 7대 국회의원 선거 때였습니다. 안병달은 그 선거에 야당인 민주당으로 출마를 해 낙선을 했고 위인은 민주화 운동에 헌신한 그를 눈여겨 봐뒀던 것입니다.
1985년 김대중. 김영삼 등 재야인사들은 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신한민주당을 창당합니다. 총재는 이민우가 맡았지만 실질적인 당 운영은 김대중. 김영삼 두 사람이 주도하고 있었습니다. 총선 공천은 김영삼이 도맡아 했습니다. 김영삼은 영천 선거구 신한민주당 후보로 자신을 따르던 안병달을 공천하지 않고 영천에서 9대와 10대 국회의원을 지낸 권오태 후보를 공천했습니다. 위인은 김영삼이 선거 지원 유세를 위해 영천과 가까운 경산에 온다는 사실을 알고 그와 대면을 요청해 마주 앉았습니다.
“아니, 왜 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온 안병달에게 공천을 주지 않는 겁니까? 지금이라도 기 존 공천을 철회하고 안병달에게 공천을 주십시오.”
“이 동지는 그렇게 밖에 생각 못하나? 정치를 좀 더 멀리 내다보고 넓게 봐야지 말이야.”
김영삼의 핀잔을 들은 위인은 안병달과 함께 물러나왔고 위인은 며칠 있다가 귀국한 김대중에게 안병달을 소개했습니다. 안병달은 모시던 주군을 YS에서 DJ로 바꾸고 맙니다. 12대 총선에서 신한민주당 공천을 받지 못한 안병달은 근로농민당이라는 군소정당의 이름으로 출마를 했고 이 선거에서 그는 낙선을 했습니다. 위인은 3년 뒤에 있은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동구에 평화민주당으로 출마한 안병달 후보의 선거대책 본부장을 또 맡아서 미욱하게도 자신의 돈을 써가며 열심히 선거운동을 했지만 연거푸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교사 신분으로 선거에 참여한 것은 투미한 일이었기에 위인은 경북교육청 학부과에 불려가서 호되게 혼이 나고 시말서를 써야 했습니다. 1985년 12대 총선이 끝나고 김대중도 미국 망명에서 돌아와 국내 정치에 복귀한 터라 위인은 13년 간 근무했던 학교에 사표를 내고 가난한 야당 정치인의 외길 인생을 시작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