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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이야기
[부산·울산·경남권] 부산에서 민주당원으로 산다는 것은 이재호님 -10편
평당원이야기
2025-02-15

6월 항쟁 & 87년 대선(2)

사실 개인적으로 87년 대선이 문제로 대두된 것은 이 시점부터고, 이따금 지인들에게 우스갯소리로 ‘노태우는 두 번이나 내 생명의 은인 노릇을 했다’라는 말을 하게 된 두 번째 사연에 속한다.

노태우가 내 첫 번째 생명의 은인 노릇을 하게 된 사건이, 바로 6.29 선언 당시다.

6월항쟁 초반만 해도 거리 시위는 부영 극장 앞에 집결하여 연설회를 가지고, 연설회가 끝나면 부산역까지 행진하는 형식이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이 저녁 6시만 되면 부영 극장 앞에 모여들었고, 어느 시점부터인가 거리 행진은 교통부 로터리를 지나 서면 로터리까지로 연장되었다.

그렇게 항쟁이 진행되던 중 서면 로터리 쪽에서 전문대학 학생들이 모여 따로 집회를 시작하는데, 그 학생들이 거리 시위 경험이 없어 통제되지 않는다는 전언이 지도부에 전해졌다.

결국 남포동에서 누군가는 서면으로 넘어가야 했고, 연산동이 집이었던 내가 자원했다.

서면으로 넘어간 나는 이제는 사라진 대아 호텔 앞에 전문대학생들을 집결하게 했고, 그들 앞에 서서 분위기를 선동했다.

그렇게 분위기가 잔뜩 달아오른 청년 학생들을 시간에 맞춰 남포동 쪽으로 거리 행진하게 하고, 남포동서 올라오던 대열과 합류하는 식이었다. 

이때 문제가(?) 생겼다.

아니 정말 찜찜함으로 신경 쓰일 일이 발생했다.

서면 쪽 시위대에 합류했던 후배가 가져온 J 일보 1면에, 청년 학생들 앞에서 왼쪽 손을 번쩍 치켜든 내 뒷모습이 대문짝만하게 찍혀 있었던 거다.

찜찜함을 애써 무시하고 여느 날처럼 나는 시위를 이어갔고, 범일동쯤에서 남포동에서 올라온 팀들과 합류하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교통부 로터리를 지나는데 선발대로 나섰던 학생 몇몇이, 잔뜩 겁에 질린 채 ‘백골단이다!’라 소리치며 달려오고 있었다.

거리 행진 경험이 전혀 없었던 학생들이라 백골단이란 소리만 듣고도 난리가 났고, 대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어 여기저기로 도망치느라 바빴다.

문제는 시위로 움직이지 못했던 버스를 비롯한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자칫 혼란 중에 사고가 날 위험이 있었다.

1987년 2월7일 부산에서 열린 박종철군 추도대회를 경찰이 최루탄 난사로 무산시키면서 시내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졌다. 전경들이 시민에게 포위돼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결국 나는 시민들에게 나눠주던 전단을 말아, 그걸 경광봉 삼아 손에 들고 차량을 통제에 나섰다.

“뭡니까?”
“조용히 따라와!”

한창 차량 통제에 정신이 빠져 있는데, 누군가가 내 양 옆구리에 팔짱을 끼었다.

나를 체포한 사복 경찰관은, 지금은 없어진 교차로 모서리의 부산은행 앞 인도 쪽에 대기 중인 전투경찰 무리에게 인도했다. 
   
나를 인계받은 전투경찰관들은 나를 자신들 가운데 몰아세웠고, 그때부터 소지한 죽봉으로 매타작 파티를 벌였다. 

그렇게 길바닥에 널브러져 한동안 매타작을 경험한 나는 닭장차에 인도 되었고, ‘손님 받아라!’라는 소리와 함께 이차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결국 나는 매질을 피하려고 의자 밑으로 기어들었고, 그러자 전투경찰관들은 죽봉과 몸을 눕혀 군홧발로 쑤셔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매타작을 경험하고 동부경찰서로 옮겨졌고, 거기서는 조서를 작성하는 일 이외에는 정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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