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 back
새로운이야기
[대구·경북권] 온 몸으로 실천한 정론직필(正論直筆) ‘영남 인동초(忍冬草)’ 이육만님 -10편
평당원이야기
2025-02-15

현실 정치 속으로 


 2017년 개봉한 영화 ‘1987’에서 당시의 상황들이 사실적으로 그려졌듯이 1987년은 그동안 쌓인 한국 현대사의 모든 열망이 분출한 격랑의 해였습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으로 대학가는 연일 시위가 벌어졌고 전두환 신군부는 직선제 개헌을 하지 않겠다는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해 재야와 학생 운동권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이한열의 죽음까지 더해져 직선제 개헌을 통한 군정 종식을 열망하는 국민들의 열망은 6.10 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급기야 노태우 당시 민정당 총재가 직선제를 받아들이겠다는 6.29 선언을 하면서 민주화의 열망이 잘만 하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상황이 됐습니다. 이해 연말 13대 대통령 선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김대중 김영삼은 6월 항쟁과 6.29선언 등으로 ‘민주화의 봄’을 이끌고 있던 양대 산맥이었습니다. 어렵게 이끌어 낸 직선제 개헌에 따라 연말 대선에서 군부 정권의 연장을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았습니다. 군정 종식을 위해 양 후보의 단일화를 요구하는 국민들 목소리가 드세 지고 있었지만 양대 거두는 ‘4자 필승론’ 같은 자기만의 셈법으로 대선 승리 전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고 지지자들도 동교동과 상도동으로 나누어져 양보 없는 팽팽한 기 싸움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위인도 이즈음 야권 후보 단일화를 통한 민주화 실현과 정치적 주군에 대한 신의 사이에서 큰 고민에 빠졌습니다. 연말에 예정된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과 김영삼 두 사람 중에 한명으로 단일화가 이뤄져야 노태우 민정당 후보를 꺾고 군정을 끝낼 수 있음은 그 당시를 산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이었고 위인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 중에 누가 단일 후보가 되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재야는 물론 국민 사이에서도 의견이 둘로 나눠졌습니다. 위인은 당연히 김대중으로 후보를 단일화해서 그가 대통령이 되어야 우리나라를 살릴 수 있다는 생각을 철석 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후보 단일화 논의가 이뤄지고 있을 때 대구경북, 특히 위인의 고향인 영천에서 재야인사의 99%는 김영삼을 지지하고 있었고 영천 시민들도 김대중 보다는 김영삼으로 단일화를 바라는 정서가 강했습니다. 위인만 김대중으로 단일화해야 한다고 외롭게 외치는 상황이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야당을 하더라도 같은 경상도 출신인 김영삼과 같이 하지 왜 힘들고 고통스럽게 김대중과 정치적 한 배 타기를 고집하느냐고 질문을 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위인은 김영삼 보다 김대중을 먼저 알게 됐는데 나중에 알게 된 사람이 정치적으로 유리하다고 해서 먼저 알고 지낸 사람을 버리고 배를 갈아타는 것은 정치적 신의에 어긋나는 일이고 야당 정치인이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은 ‘지조와 소신’이라고 늘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결국 후보 단일화는 실패했고 지지층이 겹치는 두 사람의 출마로 연말 대선에서 노태우 민정당 후보에게 아슬아슬한 당선을 안겨줌으로 군부 정권은 연장이 되었습니다. ‘민주화의 봄’을 허무하게 날려 버린 역사적 책임을 진보 지식인들은 김대중과 김영삼에게 물었습니다. 이일로  김대중은 ‘대통령 병’에 걸린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다니게 됐습니다. 위인도 후일 후보 단일화를 이끌어 내지 못한 역사적 책임에 대해 한동안 자책을 했었지요. 하지만 소신과 지조를 무엇보다 우선시 하는 위인 입장에서는 정치적 주군이 대통령이 돼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히 할 수 밖에 없었고 정치 도의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한 해 전인 1986년, 김대중은 김영삼과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 공동의장을 맡아 호헌철폐와 직선제 개헌을 위한 시민운동을 이끌고 있었습니다. 김대중은 어느 날 위인에게 동교동 자택으로 잠깐 들어오라는 전갈을 보냈고 위인은 그와 마주 앉았습니다.

 “이 동지, 내년 대선 때 이 동지가 경상도를 좀 책임져 주시오. 이 동지가 꼭 그렇게 해 주시리라 알고 내 그렇게 믿습니다.”

 호남 출신인 김대중은 영남 지역에 지지 세력이 전무한 상태였기에 대선 1년 전 부터 위인에게 영남지역에서의 일정 역할을 부탁한 것입니다. 1985년 교사를 그만 둔 위인은 1986년 신일전문대 강사와 경북일보 창간에 관여하는 일을 잠깐 하고는 1987년부터 제도권 정치를 본격 시작했습니다. 1987년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가 결렬된 뒤 평화민주당을 창당했고 위인은 평화민주당 대구경북 대변인을 맡아 13대 대통령 선거를 치렀습니다. 위인의 인생에서 본격적인 야당 정치인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언론인과 교육자로 지내던 위인은 이때부터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긴 호흡으로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프로젝트 시동을 걸었습니다. 김대중이라는 거목의 뿌리에서 나온 인동초 한 줄기가 영남에서 서서히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후보 단일화 실패로 1노 3김의 대립 구도 속에 치러진 13대 대통령 선거에서 위인이 대변인으로 활동한 대구경북의 성적표는 예상대로 계란으로 바위치기였습니다. 3김 가운데 김영삼은 대구경북에서 26.2%의 득표율을 올렸고 김대중은 2.5%, 김종필은 2.3%였습니다. 그나마 위안을 받는다면 김대중 후보가 미미하게나마 김종필 후보를 앞섰다는 것이고 위인의 고향인 영천시에서 김대중의 득표율이 2.7%로 대구경북 평균보다 높고 경북지역 33개 선거구 가운데 울진, 포항, 경주에 이어 4번째로 높았다는 정도일 것 입니다.


 위인이 현실 정치에 뛰어든 이유는 단 하나,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입니다. 위인은 어렵고 힘든 시기에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것은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 길 밖에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잇따른 선거 출마 등 위인의 모든 정치적 행보는 이 목표에 맞춰졌습니다. 하지만 위인의 이 같은 목표가 위인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고향, 영남에서의 정서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후 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가 당선이 되기 까지 위인의 고단한 정치적 역정은 그렇게 이어졌습니다.


 위인이 DJ가 대통령 되기를 얼마나 열망했는지 알 수 있는 사례가 하나 있습니다. 1990년 어느 날 미국 국무성 한국담당 과장과 4시간을 넘긴 긴 통화를 한 적이 있습니다. 공보처에서 갑자기 전화가 와서 몇 날 몇 시에 미국 국무성 한국담당 과장이 위인에게 전화가 갈 것이니 받으라는 통보를 받고 이뤄진 통화였습니다. 미국 국무성 한국 담당 과장이 영어로 질문을 하면 수화기 너머 누군가 한국말로 통역을 해주고 위인의 이야기는 다시 통역을 통해 미 국무성 과장이 전해 듣는 복잡한 시스템을 통한 통화였었지요. 

 “김대중 총재님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공산주의자가 절대 아닙니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이고 애국심이 강한 사람입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대통령이 되어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김대중 총재 밖에 없습니다. 만일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불법 선거가 없었다면 벌써 대통령이 되고도 남았던 분입니다.”  
      
 미국 국무성이 왜 위인을 꼭 집어서 전화를 걸어왔는지 아직 이유를 알지 못합니다만 그 소중한 통화 시간의 대부분을 DJ가 대통령 되어야 하는 당위성만 역설한 것입니다.

0 Comments
No comment(s) pos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