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매타작을 경험하고 동부경찰서로 옮겨졌고, 거기서는 조서를 작성하는 일 이외에는 정말 편안하게 지낼 수 있었다.
문제는 이튿날 아침에 같은 날 잡혀 온 학생 대부분은 제공된 라면을 먹고 부전동 즉결 심판소로 넘어갔는데, 나는 즉결 심판소로 넘길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월 ○○일 남포동에 시위를 주도했지?”
“그런 적 없습니다. 시위 현장에 가긴 했지만, 저는 단순가담자였습니다.”
“그러면 호주머니에 있던 전단은 뭔데?”
“그건 사람들이 길바닥에 버린걸, 주워서 보관했던 것뿐입니다.”
체포된 첫날 밤 조서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나는 경찰관의 신문에 모든 사실을 부인했다.
내가 체포된 날이 6월 26일이었고 당시 부산 상황은, 계엄군이 하단 동아대 캠퍼스에 진주해 있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던 때였다.
그랬기에 자칫 잘못 엮이면 고초를 치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기에, 나는 뻔한 거짓말로 위기를 모면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내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한 것인지 의아했지만 두 번째 불려 간 자리에서, 6월 10일부터 체포된 당일인 6월 26일까지의 내 행적이 고스란히 사진으로 찍힌걸, 내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처한 상황이 내가 생각했던 훨씬 더 심각했고, 그 점은 내가 풀려난 후에 확인할 수 있었다.
내 숙부 되시는 분이 M 방송사 기자 출신으로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당시 쫓겨나 기자 대신 방송 관련기관에 재직 중이셨고, 고모부 되시는 분은 부산 지방지인 국제신문에 장기근속하다가 퇴직하신 분이 계신다.
그랬기에 평소에는 경찰관들과 매우 잘 지내는 편이고, 웬만한 부탁은 쉽게 들어주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체포된 사실을 확인하고, 여러 차례 면회를 부탁했음에도 면회조차 시켜주지 않더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다가 구금 기간을 넘긴 29일 새벽 또다시, 나를 담당했던 하 형사란 분이 임시로 가둬둔 지하 식당으로 내려왔다.
“이재호. 일어나.”
“예.”
밥 먹고 하는 일이 없어 심심하던 차에, 잘 됐다 싶어질 정도다.
나는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을 향했는데, 문을 나서자마자 평소와 달리 양쪽에서 팔짱을 끼는 것이다.
순간 ‘X 됐다!’라는 생각 말고는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하 형사님,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급해?”
“좀 그렇습니다.”
“알았어. 빨리 보고 나와.”
지금은 경찰서 내부 조직도에서 사라졌지만, 당시 나를 조사했던 부서가 대공계였다.
대공계는 별관 4층(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곳을 5층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이었는데, 분위기상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영화에서 본 것처럼 화장실 창문을 통해 도망칠 생각을 했고, 그래서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말했던 거다.
하지만 그 생각은 도저히 실행에 옮길 수가 없었다.
창문을 깨고 밖으로 나갈 수는 있을 거 같은데, 문제는 아래를 내려다보니 거기서 뛰어내리면 도무지 살아날 재간이 없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거 그대로 베껴 써.”
“예?”
“내 말 못 들었어? 토씨 하나 틀리지 말고, 그대로 베껴 쓰고 외우라고.”
하 형사가 내게 건넨 서류는 앞에 내가 진술했던 진술 조서였고, 그걸 이 자리에서 베껴 쓰라는 말이었다.
심지어 내가 쓴 진술 조서를, 그대로 외우라는 말까지 했다.
실제 하이라이트는, 이어진 하 형사님의 말이었다.
“이재호. 여기서 다른데 가더라도, 여기서 진술한 거에서 절대 빼지도 더하지도 마라. 안 그러면 너도 피곤해지고 우리도 피곤해진다.”
다른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오로지 내 귀에 들린 소리라고는, ‘다른데 가더라도’라는 그 한마디뿐이었다.
경찰 대공계에서 다른 데로 넘어간다면, 그곳이 안기부 말고 어디겠는가?
경찰 소관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조차 대학생이 죽어 나가는 시절이란 점을 차치하고라도, 전신(前身)인 중앙정보부의 악명은 세 살 먹은 아이조차 아는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조서 작성을 모두 끝낸 나는 다시 지하로 돌아왔고, 호시탐탐 탈출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
하지만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막혀 있고 입구는 경찰관이 지키고 있으니, 도망칠 방법이라곤 애당초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