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은 이미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와 1988년 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안병달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두 번의 선거를 치르면서 영남에서 ‘김대중 정당’의 한계와 현실 정치의 벽을 확인했습니다. 더구나 위인은 한 해 전인 1991년, 30년 만에 지방자치제의 부활로 실시된 시도광역의회 의원 선거에 평민당에서 이름을 바꾼 신민당으로 영천 제1선거구에 경북도의원으로 출마를 해서 낙선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었습니다. 3당 합당으로 ‘호남 정당’으로 고립된 신민당은 그해 선거에서 목표인 200석에 훨씬 못 미치는 165석을 확보해 참패한 반면 여당인 민자당은 564석을 확보했습니다.
이 선거는 위인의 인생에 있어서 처음으로 출마한 선거였습니다. 더구나 이 선거도 위인이 자청한 출마가 아니었습니다. 제1회 지방선거에서 3월에 치러진 기초의회의원 선거는 정당 참여가 금지됐지만 6월에 있은 광역의회의원 선거는 정당 참여가 허용됐습니다. 이에 따라 여야는 30년 만에 부활된 지방자치제의 상징성을 살리기 위한 까닭수로 자신 정당의 소속 후보들을 될 수 있으면 많이 내고 또 당선되기를 바랐습니다. 당시 신민당은 지구당위원장은 의무적으로 지방선거에 출마하도록 하고 있었는데 영천지구당 위원장이었던 위인도 할 수 없이 출마 하게 된 것이지요.
김대중은 위인이 인생 처음으로 출마한 선거에 힘을 실어주고 격려해 주기 위해서 1991년 6월 위인의 선거 사무실을 방문했습니다. 영남에서 인기 없는 정치인이지만 제1 야당 지도자가 영천을 찾았다는 사실 만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 됐고 위인의 선거 사무실 주변의 도로는 인산인해로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습니다. 선거 전에 위인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위인이 무소속으로 출마를 하면 당선 가능성이 높다고 권유를 했지만 지조와 신조를 최고의 가치 덕목으로 생각하는 위인으로서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선거가 끝난 뒤에도 많은 시민들이 무소속으로 출마를 했으면 무조건 당선이 되었을 것이라며 안타까워했지만 위인은 새겨듣지 않았습니다.
정치 입문 이후 두 번의 총선은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한 번의 지방선거는 본인이 직접 출마를 해서 모두 실패한 터라 위인은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습니다. 더구나 영천지구당은 앞서 위원장을 했던 사람들의 부실 운영으로 사고 지구당이 되어 있는 상태였습니다. 서울에서 만난 정대철, 김상현 등 위인의 정치적 동지들은 위인에게 14대 총선에 영천에서 출마할 것을 계속 요구하고 있었지만 위인은 거절하고 있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 총재의 한 밤중 전화를 받은 것입니다.
총선 후보자 등록 사흘 전에 걸려온 김대중의 전화, 영천에서는 김대중 자신이 직접 출마해도 당선 안 되는 줄 알지만 뿌리를 지키고 이어나가려면 뿌리 당원 1호인 위인이 출마를 해야 한다는 김대중의 전화를 받고 덜컥 그렇게 하겠다고 했지만 후보 등록을 위한 시간은 너무 촉박했습니다. 전화를 받은 다음날 동트자마자 중앙당에서 공천장을 갖고 내려와 후보 등록을 위한 서류들을 발급 받느라 이리 저리 뛰어다니고 있을 때 일이 하나 터졌습니다.
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영천에 출마하는 한 후보자의 측근 서너 명이 후보 등록 서류 제출을 위해 동분서주 하고 있던 위인을 인근 다방으로 데려가 후보 등록을 하지 말라고 회유를 한 것입니다. 위인도 얼굴을 잘 아는 이 측근들은 그때 돈으로 상당히 큰 금액인 2천만 원을 건네며 후보 등록을 하지 말 것을 요구했지만 위인은 거절했습니다. (내가 그 돈다발을 다 세워봐서 아는 것은 아니고 후일 들어서 확인한 액수입니다.)
“내 아내가 내게 표를 주지 않고 나 혼자 내 표를 내가 찍더라도 나는 이번 선거에 개표까지 무조건 갑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나한테는 통하지 않습니다.”
14대 국회의원 선거 출마는 김대중과의 약속이기도 했기에 위인은 민주당 후보로 등록을 기어이 마쳤습니다. 총선 출마 예정 후보의 측근들이 큰돈까지 주면서 위인의 후보 등록을 막으려고 한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알 수가 없습니다. 추측하기로는 위인이 영천 사회에서 오랫동안 야당 생활을 해왔고 또 언론인 출신이어서 선거 과정에서 불법이나 탈법이 문제가 되면 위인이 계속 물고 늘어지고 해서 선거를 유리하게 치르는데 걸림돌이 되기 때문에 위인이 후보 등록을 하지 말도록 회유한 것이 아닌가 생각할 뿐입니다. 위인의 인생 두 번째 선거도 늘 위인에게 변함없는 지지를 보여주는 2천여 명의 유권자만 표를 줬을 뿐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위인이 인생 첫 선거 출마를 한 것이 1991년 6월 20일에 있은 지방선거 광역의회의원 선거였습니다. 이 해 5월 1일 위인의 장남이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대구MBC 기자로 입사로 했습니다. 위인, 당시 장남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입사 한지 한 달 20일 만에 치러진 지방선거에 자사 소속 기자의 아버지가 출마를 했는데 그 아버지가 당시 영남에서는 극도로 꺼리던 ‘김대중 정당’ 후보자인데다 영남에서는 빨갱이라 부르는 김대중과 친분이 두터운 DJ통으로 알려진 사람이니 당연히 회사 안에서 경영진 등이 장남을 보는 시선이 고울 리가 있겠습니까? 장남이 알려준 후일담을 들으니 회사 안에서는 사람을 잘 못 뽑았다는 얘기까지 장남의 귀에 들렸고 장남은 직장 생활 초기부터 위축되고 의기소침해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위인의 선거 출마는 다음해 14대 국회의원 선거와 4년 뒤 15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이어졌고 특종 기자로 명성을 떨치던 위인의 장남은 뉴스 앵커를 하다가도 선거 때만 다가오면 영문도 모르고 앵커 자리에서 내려 와야 하는 등 야당 정치인 아버지를 둔 탓에 4년 마다 되풀이해서 굽잡히는 마음의 고충이 컸습니다. 장남뿐이겠습니까? 나머지 자녀들도 성장 과정에서 이래저래 말 못할 사정들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 남몰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 그래도 없는 살림에 선거 한번 씩 치를 때 마다 쌓여가는 빚더미와 찌든 살림은 위인의 반려자 서명희 여사가 헤쳐 나가야 할 몫이었고 자녀들의 어깨에도 천근만근 무게의 짐이 됐습니다.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정치적 라이벌 김영삼에 패한 김대중은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누가 봐도 자진 유배 같이 영국으로 출국합니다. 김대중은 1995년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는 등 정치지형이 바뀌자 귀국해서 정계 복귀를 선언하고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합니다. 위인은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 새정치국민회의 간판으로 출마를 했습니다. 15대 총선에는 영천에서는 무려 7명의 후보가 난립해서 선거를 치렀습니다. 후보 가운데는 영천에서 큰 병원을 운영하던 사람도 있었는데 돈이 많다 보니 선거운동도 화려했습니다. 지붕이 없는 큰 차, 무개차를 연예인과 함께 타고 카퍼레이드를 벌이며 선거 운동을 했지만 위인은 막내아들이 어깨 위로 무등 태워주는 것에 만족해야 했지요. 병원 이사장을 하던 이 후보는 위인의 대학교 후배이기도 하지만 여러 번 위인의 속을 뒤집으며 속상하게 한 전력이 있어서 위인의 눈살을 늘 찌푸리게 하는 사람이었는데 영천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치러진 후보 합동 연설회에서 오랜 만에 위인의 얼굴에 잠깐 웃음이 돌게 한 일도 있었습니다.
“유권자 여러분, 이번 선거에 여러 분이 출마를 했습니다만 여러분, 솔직히 이 분들 가운데 정치인다운 정치인이 누가 있습니까? 내가 보기에 저 단상에 있는 후보들 가운데 이육만 후보 빼고는 제대로 된 정치인이 아무도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여러분.”
정치적 실익과 계산에 따라 이당 저당을 옮겨 다니는 비루한 철새 정치인이 넘쳐나고 정치적 주군에 대한 배신이 팽배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면서 소신과 지조를 지키는 위인을 치켜 세워준 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한 저의는 자신이 순결한 무소속 후보임을 강조하기 위한 정치적 수사였기에 위인은 우쭐댈 이유는 없었습니다.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영천에서는 여당 후보가 당선이 되었고 위인은 정계 은퇴를 번복한 김대중에 대한 유권자의 준엄한 심판까지 더해져 2.4%의 낮은 지지율로 낙선 했습니다. 전국적으로도 새정치국민회의는 79석을 얻는데 그쳐 김대중의 대선 행보에도 빨간불이 켜졌습니다.
“사람들은 내리 세 번씩이나 선거에 출마한 나 보고 국회의원 병에 걸렸느니 어쩌니 말을 하지만 나는 한 번도 당선된다는 생각으로 출마를 한 적은 없어. 나도 이 척박한 토양에서 당선 되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아. 하지만 한 번씩 선거를 치를 때 마다 잇몸이 내려앉고 몇 년씩 늙어버리는 것 같은 힘든 고통을 겪으면서도 출마를 해야 하는 것은 나 하나라도 출마를 해야 여기 영남에도 김대중 총재를 따르고 지지하는 무리가 있음을 보여줄 수 있고 이런 실낱같은 희망이 그 분이 대통령이 되는데 작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야. 땅이 아무리 메마르고 척박하다고 해서 아무 것도 심지 않으면 결국 황량한 사막이 되고 말겠지만 어쨌든 심고 심어서 뿌리라도 남아 있으면 그 뿌리에서 언젠가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열매를 맺고 씨앗을 퍼트려서 새들이 깃들고 노래하는 날이 분명 온다고 나는 확신했어. 나 하나라도 뿌리를 유지하고 있으면서 언젠가는 영호남 사이에 지역감정이 사라지고 서로 하나가 되는 그날을 위한 자양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나는 만족해.”
야당 뿌리 당원으로 평생 영남을 지킨 위인은 2016년 더불어민주당 당시 문재인 당대표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문재인 당대표는 감사장에서 위인이 자랑스러운 뿌리당원임을 밝히고 위인이 민주, 민생, 통일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고 어려운 환경에서 굳건히 당을 지켜 강건한 뿌리 역할을 해 온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