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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이야기
[부산·울산·경남권] 부산에서 민주당원으로 산다는 것은 이재호님 -14편
평당원이야기
2025-03-16

6월 항쟁 & 87년 대선(6)

 

“아주머니 정말 죄송하지만, 국수 한 그릇 외상으로 먹을 수 없겠습니까?”

손님이 뜸해져 포장마차를 접어야 할 즈음, 나는 포장마차로 다가가서 정말 뻔뻔하게도 국수를 외상으로 달라고 부탁드렸다.

정말 황당했던 사실은 내 이런 뻔뻔한 말에도, 아주머니께서는 말없이 뜨거운 물에 면을 푸셨고, 심지어 채소와 함께 보통 한 장만 올리는 넓적한 어묵까지 푸짐하게 얹어주셨다. 
 
온종일 굶은 탓에 고맙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할 겨를조차 없이, 허겁지겁 국수를 입안에 삼켰다.

“아주머니 정말 잘 먹었습니다. 국숫값은 최대한 빨리 갚겠습니다.”
“무슨 사연인지 묻지 않을 테니, 앞으로 배가 고프거든 언제든지 찾아와.”
“예?”
“행색을 보면 거지꼴인데 거지는 아닌 거 같고, 그러니 사연이 있어 집에 들어가지 못하는 거잖아? 데모했느냐고 묻지는 않을 거니,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오라고.”

사실 지금 내 행색은, 누가 보더라도 거지꼴이다.

거의 한 달 가까이 집에 들어가지 못해 옷을 갈아입지도 못하고, 이제 만화방 갈 돈조차 없을 때가 많아서, 지하상가 화장실 입구에 골판지를 깔고 잠을 청하는 노숙자 아닌 노숙자 신세 아닌가 말이다.

그러다가 보니 빨간색이었던 누비옷은 회색빛으로 변했고, 씻지 못한 몸에서는 쉰내가 폴폴 날 지경이다.

포장마차 아주머니 덕분에 최소 하루 한 끼는 해소할 수 있게 되었지만, 아주머니께 신세 지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틀에 한 번꼴로 동래경찰서 앞 다방에 전화해서 강 형사란 양반 메시지를 받곤 했는데, 강 형사님이 당분간 부산을 떠나 있으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고민하던 중, 학과 후배이자 대학방송국 후배에게 도움을 청했다.

“선배. 광주 고속버스 터미널에 도착하면 내가 그리로 갈 테니까, 광주까지만 오소.”

결국 학교 방송국 후배 몇 명에게 구걸하다시피 해서, 광주까지 차비를 얻어 광주행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광주 터미널에서 10여 분쯤 기다리니 후배가 터미널 앞에 도착했고, 나는 그 후배가 몰고 온 덤프트럭 조수석에 올라탔다.

“불편하더라도 여기서 나하고 지냅시다.”
“고맙다.”

도착한 곳은 전북 정읍의 ‘신라장’이라는 여관이었다.

후배는 이곳 정읍의 대우 부품공장 건설 공사 현장 기사로 와 있었고, 숙소는 회사에서 잡아준 것이었다.

여관에 들어가서 가장 먼저 한 일은, 한 달 가까이 씻지 못했던 몸을 씻는 일이었다.

내가 씻을 동안 후배는 시장엘 다녀온 건지, 갈아입을 옷을 내게 건넸다.

“이건 밖에 나갈 때 입고 다니소.”
“나 이 회사 직원도 아닌데?”
“이 점퍼만 입고 다니면, 정읍 사람들 잘 해줍니다.”

사실 이 당시엔 영호남 지역갈등이 격화한 상황이고, 더군다나 김영삼·김대중 두 정치 지도자의 후보단일화 실패로, 호남지역 주민들이 경상도 사람에 대한 감정이 극도로 나빴다.

오죽하면 3,000원짜리 비빔밥을 경상도 놈들에겐 30,000원에 판다는, 유언비어까지 나돌 정도였겠는가? 

하지만 같은 경상도 촌놈이라고 하더라도, 지역 주민을 먹여 살릴 공장을 건설하러 온 근로자들에게는, 정읍 주민들은 지나칠 정도로 관대했다. 
  
후배가 출근해야 하니 낮에는 대부분 혼자 지낼 수밖에 없었고, 점심 또한 혼자 알아서 챙겨 먹어야 했다.

그때 가장 맛있게 먹었던 음식이 돌솥비빔밥이었는데, 후일 부산에 돌아와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찾아다녔을 정도다.

물론 아무리 찾아다녀 봐도, 그때 정읍에서 먹었던 돌솥비빔밥 맛을 내는 음식점은 찾지 못했지만 말이다.

정읍에서 부산으로 돌아온 건, 노태우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대선 기간에 벌어진 사건에 대해 모든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후다.

덕분에 내게 내려졌던 수배도 풀렸고, 그 사실을 동래서 강 형사께 확인하고 부산으로 돌아왔었다.

아무튼 그렇게 노태우와의 인연 아닌 인연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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