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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이야기
[대구·경북권] 온 몸으로 실천한 정론직필(正論直筆) ‘영남 인동초(忍冬草)’ 이육만님 -14편
평당원이야기
2025-03-16

꿈을 이루다


 14대 대통령 선거의 승패를 가른 것은 고위 공직자들이 모여서 지역감정을 부추기고 특정 후보를 돕는 선거 전략을 짰다는 사실을 폭로한 ‘초원복집’ 사건입니다. 지역감정 조장이라는 지탄 받아야 할 근원적 행위를 불법 도청이라는 어찌 보면 한 차원 낮은 지엽적인 문제로 덮어버린 사건으로 김영삼 측의 프레임 덧씌우기 전략이 먹혀 든 것입니다. 영남권의 몰표가 승부를 갈랐습니다. 영남권 전체에서 얻은 김영삼의 표에서 호남권에서 얻은 김대중의 표를 뺀 만큼 딱 그 만큼의 표 차이로 대선 세 번째 도전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김대중은 선거 다음날 민주당사로 출근해 의원직과 대표 최고위원직을 사퇴하고 당직자들과 지지자들의 눈물과 탄식, 한숨 속에 준비해 온 정계은퇴 성명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저는 또다시 국민 여러분의 신임을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저의 부덕의 소치로 생각하며 패배를 겸허한 심정으로 인정합니다. (중략) 저는 오늘로써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평범한 시민이 되겠습니다. 이로써 40년의 파란 많았던 정치생활에 사실상 종말을 고한다고 생각하니 감개무량한 심정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그간 국민 여러분의 막중한 사랑과 성원을 받았습니다. 국민 여러분의 하해 같은 은혜를 하나도 갚지 못하고 물러나게 된 점 가슴 아프고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영천에서 정계 은퇴 선언을 지켜보던 위인은 긴 한숨을 내쉬며 울분을 삼켜야 했습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DJ가 강원도에서 태어났다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을까 생각하니 하늘 보다 높은 지역 장벽이 한스럽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김대중은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케임브리지대학에서 객원교수로 연구 활동을 하다 7월 귀국한 뒤 1994년 ‘아시아 태평양 평화재단’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는  1995년 제1회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에서 민주당이 승리하자 정계 은퇴를 번복합니다. 그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79석을 얻어 제1 야당의 지위를 굳힙니다. 이듬해 충청지역의 맹주를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과 이른바 DJP 연합을 이끌어 내고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합니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여당인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선 도전 4번째 만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를 일궈냈습니다. 

 

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됨으로써 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경향신문 1997. 12. 19.)


 선거일 당일 오후 6시 MBC는 개표 방송을 통해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 포인트 앞선 것으로 나타난 출구 조사 결과를 방송했습니다. 방송을 지켜보던 위인과 당직자들은 반신반의 하면서 개표방송을 지켜보며 웃다 울기를 반복했습니다. 개표 초반에는 출구조사와는 달리 이회창 후보가 앞서 나갔습니다. 밤 10시를 기점으로 김대중 후보가 앞서기 시작했고 1.5%에서 2% 가량 우세를 이어나가다 39만 표 차이로 당선을 확정지었습니다. 위인과 당직자들은 서로 얼싸안고 목이 터져라 만세를 불렀습니다. (나도 그날 태어나서 가장 많이 위인의 어깨 위로 들려서 올리고 내려졌던 날입니다.) 위인을 비롯한 당직자들이 만세를 부르며 환하게 웃는 모습은 다음날 지역 신문 1면에 사진이 실렸습니다. 1971년 첫 만남 이후 위인이 줄기차게 꿈꿔온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가 26년 만에 현실이 된 것입니다.  
     
 “그때 당시 선거 사무실이 영천 문화원 옆에 있었는데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서로 얼싸안고 사무실이 떠나가도록 고함을 질렀어. 그때 기쁨이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야. 내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가장 기쁜 날이었어. 사람들이 말하는 희열이 뭔지 어떤 것인지 그때 느낄 수 있었어.” 

 위인은 가난한 야당 정치인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DJ가 대통령에 당선되기 까지 모두 8번의 선거를 치렀습니다. 3번의 대선에서 야당 후보인 김대중의 지역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고 4번의 총선에서 두 번은 야당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으로, 두 번은 ‘김대중 정당’ 후보로 직접 출마를 했습니다. ‘김대중 정당’으로 출마했던 또 한 번의 지방선거까지 합치면 위인이 야당으로 오롯이 몸으로 뛰어다니며 부대낀 선거는 모두 8번입니다. 8번 선거의 목표는 늘 똑같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로 한결 같았지요. 위인으로서는 8번의 고단한 레이스 끝에 마침내 결승 테이프를 끊은 것입니다. 70년대 군사독재와 80년대 신군부 하에서 ‘김대중 병’ 환자로 요시찰 대상이 돼서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으며 척박하다 못해 황량한 야당 불모지 영남에서 김대중만 바라보며 묵묵히 걸어온 외길인생이 종착역에 다다른 것입니다.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 나의 머리에는 위인이 동교동 빈 집을 찾아 울분을 삭히며 김대중 문패를 어루만지던 손길과 담뱃진에 찌들었던 내 몰골의 기억하며, 미국 국무성 한국담당 과장과 통화를 하며 DJ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할 때 수화기를 움켜쥐었던 절박했던 심정 등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15대 대통령선거에서 위인은 새정치국민회의 영천 선거대책위원장과 경북 선거대책위원회 공동 위원장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선거에서 영천의 김대중 지지율은 15.9%로 경북 평균 13.7%와 대구 평균 12.5% 보다 훨씬 높았습니다. 경북 27개 선거구와 대구 13개 선거구를 합친 40개 선거구 가운데 18.1%의 영양과 17.9%의 청송에 이어 영천은 3번째로 김대중 지지율이 높았습니다. 영양과 청송의 유권자는 2만 명 안팎이지만 영천이 선거인 수가 9만 명이었으니 지지한 사람 숫자는 영천이 가장 많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덕분에 위인이 한 번씩 중앙당에 볼 일이 있어 올라가면 조직국장 등 당직자들은 위인을 보고 “영남 총재님, 오십니까? 너무 고생 많으십니다. 힘내십시오.”라고 인사를 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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