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인이 대구 봉덕동 자유원에서 반려자 서명희 여사를 만나 한 가족을 이룬 뒤 장남이 태어나고 경북여상 교사를 거쳐 대구일보 기자를 하다 영천으로 생활의 근거지를 옮긴 것이 1967년입니다. 영천에서 맨 처음 주거지로 잡은 곳이 완산동 1000번지 지금의 말죽거리였지요. 달걀 부화장을 겸하고 있던 사무실 한편에 대구일보 영천지국을 같이 운영하면서 영천에서의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주재기자가 지국장도 겸하고 있어서 취재와 함께 신문 부수 확장을 위한 영업 활동도 하고 신문 배포도 같이 해야 했습니다. 완산동에서만 장남이 초등학교 입학 할 때까지 6년 동안 삼남상회 뒷집, 쥬단학 화장품 가게 뒷집 등 반경 200미터 안에서 3번 이사를 했고 신문사 폐간으로 기자를 그만 두고 금호중고등학교 교사를 시작하던 1973년 금노동 임노인 집으로 이사를 했다가 다음 해 금노동 또 다른 집으로 이사를 한 번 더 했습니다. 위인의 6남매 가운데 막내아들이 태어나던 해인 1977년에는 금호강 건너 문외동 녹색 기와지붕 집으로 이사를 했고 다시 문내동으로 이사를 갔다가 다시 완산동 신시장으로 주거지를 옮겼습니다. 이어 영천역 앞에 잠시 살았고 또 금호강을 건너 야사동으로 이사를 했지요. (내가 기억을 더듬어 이렇게 장황하게 이사 다닌 내력을 세세하게 적는 이유는 그만큼 위인과 가족들이 이사를 많이 다녔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무슨 애먼 무소유 철학이 있어서 집을 안 가진 것은 아니고 젊어서 처음에는 집을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았어. 교사하다 기자하다 다시 교사하면서 직업을 자주 옮기는 바람에 목돈 만들기가 쉽지 않았어. 그러다가 금호중고등학교 교사를 10년 정도 안정적으로 하면서 대출을 내서 집을 한번 가져볼까 생각을 했었는데 1985년도에 안병달 후보 선거대책본부장을 하면서 선거를 끝내고 보니까 빚이 엄청 져 있어서 결국 포기를 했어. 내가 다른 사람의 선거를 돕든지 내가 출마를 하든지 일단 선거를 치루고 나면 빚 덩이에 앉아야 하니까 괜히 대출을 내서 집을 갖고 있다가는 집을 날리기 십상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치에 입문하고 나서는 아예 집 갖는 것을 포기했지. 10살 많은 큰 형님이 나보고 집도 한 채 없는 사람이 남의 선거 돕다가 또 빚진다고 늘 뭐라고 하셨지. 큰 형님이 ‘선거 나가는 사람은 떨어져도 집이라도 있으니 반 바보지만 집도 없이 선거를 도우고 빚을 지는 너는 온 바보다.’이러면서 정신 차리라고 몇 번 꾸지람도 하셨지.”
위인이 금호중고등학교 교사를 그만 두고 본격적으로 현실 정치에 뛰어든 80년대에는 거의 1년에 한번 꼴로 이사를 했습니다. 어떤 때는 비어있는 가축우리에서 살았던 때도 있었지요. 자주 이사를 다니다 보니 살림살이는 언제나 단출했습니다. 집주인이 나가라고 하면 언제든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 했기 때문이지요. 1967년 위인이 영천에 정착하고 나서 2009년 자녀들이 새 집을 지어주기까지 40여 년 동안 20번이나 이사를 다녔습니다.
초·중·고 학창시절을 보내면서 자기만의 공부방은 꿈도 못 꾸고 책상 하나 없이 학교를 다녀야 했던 위인의 자녀들은 집 없는 서러움이 뼈에 사무쳤습니다. 2009년 위인의 장남이 다니는 직장에서 퇴직금을 중간 정산해서 받은 돈과 차남이 은행에서 대출을 받은 돈을 합쳐서 영천시 과전동 지금의 2층 주택을 지었습니다. 이로써 40여 년 동안 한 번도 버젓한 문패를 달아 본적이 없었던 유랑 아닌 유랑 생활을 마침내 끝낼 수 있었습니다. 더구나 2층에는 장남의 장인과 장모를 모시도록 해서 사돈 끼리 한 지붕 아래 사는, 요즘에 보기 드문 대 가족을 이루었지요.
인생 황혼녘에 비로소 번듯한 집도 소유하게 되고 행복을 누리게 됐지만 되돌아보면 매년 이사를 다녀야 했던 어려운 시절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정사의 불행이 이어져 삶이 버거울 때도 있었습니다.
위인이 금호중고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현실에 정치에 뛰어든 1986년 위인의 평생 반려자 서명희 여사가 교통사고를 당해 오른쪽 다리를 크게 다치고 말았습니다. 야당 정치인으로 정치판에 뛰어든 위인 때문에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는데다 선거가 한번 씩 끝나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던 시절이니 보다 못한 여사가 생활전선에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지요. 보험회사 소장을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응시를 했는데 또 덜컥 합격을 한 겁니다. 십대 후반 대구교도소 교도관 시험에 생애 첫 합격한 이후 생애 두 번째 시험에도 또 합격을 한 것이지요. 영천에서 보험회사 소장을 하던 어느 날 집으로 퇴근을 하는데 평소 알고 지내던 분을 만나 집까지 태워 준다는 말에 그의 차를 얻어 탄 것이 화근이 됐습니다. 집과 가까운 지금의 영동교 사거리에서 여사가 탄 차를 시내버스가 옆구리를 들이받았고 차문 짝이 찌그러지면서 여사는 오른쪽 다리를 심하게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습니다. 병원에서는 산산조각 난 다리뼈의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 주며 다리를 절단해야 한다고 했지만 위인과 가족들이 못 걸어도 좋으니 절단만은 하지 말고 치료를 해 달라고 애원해서 뼈 조각을 하나하나 맞춰 핀으로 잇는 대수술 끝에 다리를 잃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6개월 간 꼼짝을 못하고 다리를 천정에 매달아 두는 병원 신세를 져야 했습니다. 여사의 긴 병원 생활에서 병간호는 대학을 휴학하고 군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장남이 오롯이 다 해야 했습니다. 이후 여사는 결국 정상적인 보행이 어려운 장애인이 됐습니다.
“하필 얻어 탄 차가 보험도 가입돼 있지 않았고 등록도 하지 않은 이른 바 무적차량이었어. 운전자가 사고가 난 뒤 사흘 뒤에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나타나서 경찰에서 피해자와 합의서에 도장을 받아 오지 않으며 구속시킨다고 하는데 도장만 찍어 주면 병원 치료비는 자기가 다 부담하겠다고 해서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줬더니 그날 밤에 가족들이 전부 야반도주를 해 버린 거라.”
훗날 이 운전자는 위인과 길거리에 맞닥뜨렸고 위인을 보고 도망가던 운전자는 결국 위인과 마주보게 되었습니다.
“도망을 왜 가노? 보자. 거기 좀 서 봐라. 얘기 좀 하자.”
“정말 뭐라고 말씀드려야 할지.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람이 어째 그렇노? 돈이 없으면 없다고 나중에라도 갚겠다고 하면 되지 그렇게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나?”
“죄송합니다. 지금이라도 앞으로 열심히 일해서 갚아 나가겠습니다.”
“지금도 보아하니 사정이 딱한 것 같은데 다 잊어버리고 더 이상 나를 피해 다니지 말고 이제부터는 정상적으로 살아가도록 해라.”
서명희 여사가 병원에 입원한 기간은 6개월 쯤 됩니다. 병원 수술비와 치료비가 1986년 당시 돈으로 4천만 원에 이르렀으니 집 한 채 값이 병원비로 고스란히 날아간 셈이지요. 여사가 입원 치료를 받았던 곳은 성 베드로 병원이었습니다. 당시 이 병원의 이사장은 훗날 1996년 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위인과 나란히 출마했던 위인의 대학교 후배이고 당시 무소속으로 출마했던 후보입니다. 돈이 많아 지붕 없는 무개차를 타고 선거운동을 펼쳤고 선거 유세장에서 정치인다운 정치인은 위인 밖에 없다고 띄워주던 그 사람입니다.
“병원비 4천만 원을 한꺼번에 다 낸 것은 아니고 중간 중간에 수납을 통해 갚았고 퇴원 할 때쯤에는 160만 원 정도를 못 낸 상태였는데 내가 나중에 꼭 갚겠으니 퇴원부터 좀 하자고 했더니 이사장은 원무과장에게 가보라 하고 원무과장은 이사장에게 가보라고 해서 왔다 갔다 하는데 정말 비참한 생각이 들더라고. 어떻게 돈을 조달해서 퇴원은 했는데 그 뒤로는 그 병원 앞을 지나가면 예전 고생하는 생각이 나서 늘 고개를 돌려버렸어.”
불행은 뭉쳐서 온다고 했던가요? 여사가 큰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에 곰비임비 위인의 차남이 사고를 당했습니다. 대학에 갓 입학한 차남이 학비라도 벌 요량으로 목욕탕 보일러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손가락 3개 두 마디씩을 잃어버린 겁니다. 사고 소식을 듣고 위인의 장남이 사고 현장으로 달려갔고 거의 실신한 동생을 그의 친구들과 들춰 업고 면장갑이 씌워진 채 바닥에 나 뒹굴고 있는 손가락을 주워 담아 경북대병원 응급실로 달려갔습니다. 병원에서는 시간이 많이 지체된 데다 잘린 손가락이 기름 등으로 오염이 심해서 접합 수술은 어렵다고 난색을 표했습니다. 의료진은 당시에 손가락 접합 수술을 전문으로 하던 현대병원을 소개하며 가보라고 해서 다시 달려갔지만 그 곳에서도 접합 수술은 이미 늦었다고 해서 상처를 봉합하는 치료를 받고 입원했습니다. 뒤늦게 사고 소식을 접하고 병원으로 달려온 위인은 차남의 다친 모습을 보고 조용히 병실을 나가 병원 뒤쪽 골목길에서 벽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북한군의 총구 앞에 가슴을 내밀며 소리치던 소년 이육만 시절부터 한국 전쟁 이후 전쟁고아와 함께 하던 그 험난한 시절을 살면서도 한 번도 운 적이 없었던 위인입니다. 악명 높았던 중앙정보부 지하실에서도, 군사정권의 그 삼엄한 감시하의 교단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린 적이 없었지요. (나는 솔직히 위인은 눈물 샘 자체를 가지지 않고 태어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 대범한 사람이 차남의 잘린 손가락을 보고 펑펑 울다니 위인! 혹 위인의 18살 시절 교실에서 잘라냈던 나를 생각하고 슬픔이 더 북받친 것은 아닌지요?) 하기야 야당 정치인으로 고된 삶과 여사의 교통사고에 이은 차남의 입원은 아무리 강철 같은 심장을 가진 위인이라 하더라도 그 누적된 슬픔을 터트리지 않고 지나기는 그때 어려웠을 겁니다. 요즘이야 나이가 든 위인이 병으로 아플 때 마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불러주시던 찬송가를 들으며 자주 눈물을 흘리지만 내리 3번의 선거에서 낙선했을 때도, 비례대표 경북도의원이 좌절됐을 때도, 그 이후로는 위인은 절대로 눈물을 보인 적이 없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