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가 생긴다면, ‘정치 부재(不在)의 시대’란 제목으로 긴 글을 쓸 계획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있는 일반 국민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를 어떻게 보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현 대한민국 정치를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나는 서슴없이 지금 대한민국에는 정치가 사라진 정치 부재(不在)의 시대라고 말할 것이다.
혹자(或者)는 국회만 아니라 전국 각지의 지방 의회조차 잘 돌아가고 있는데, 무슨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소리냐고 반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현 대한민국 정치는 하드웨어만 남아있을 뿐, 소프트웨어 쪽은 텅 빈 상태라고 말하고 싶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부분에 있어서는 집권당인 국민의힘보다, 정통 야당의 맥을 이어오던 민주당이 더 심하다.
현재 민주당 내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있기나 한가?
명색이 개개인이 헌법 기관이라 자처하는 국회의원이란 양반들이, 이재명의 하명(下命)만 기다리면서 숨죽여 살고 있지 않은가?
기껏 목소리를 내는 야권 인사라고 해봐야, 이미 정계를 은퇴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이 유일무이하다고 할 것이다.
한때는 총기(聰氣)와 엄청난 정보를 가지고 국회를 쥐락펴락하던, 박지원 전 국정원장의 쇠락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이재명의 독선적 당 운영에, 당내 투쟁보다 장외 투쟁을 결단한 이낙연 전 총리가 처한 현실이 안타깝다.
이런 이유로 우리 민주당에는 새로운 바람이 필요하고, 정치적으로 학습된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사실 정치 부재(不在)는 국회의원 개개인에겐 드러난 손실이 없을지 몰라도,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 몫으로 다가오기 마련이다.
정부 부처의 장관 청문회에서, 절대다수 의석을 차지한 민주당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여 부적격을 통보하고, 행정부 수반인 대통령은 보란 듯이 국회를 무시하면서 임명을 강행하는 문제는 의외로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정치적 관점이 아니라 민생 차원에서 그러한데, 문제는 우리 서민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기에 국민이 그걸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권 출범 이후 2년 반 동안 이런 식의 여야 대치가 계속되었고, 그로 인하여 민생 법안 처리는 계속 뒷전으로 밀려난 상황이다.
결국 그 피해는 오롯이 국민 개개인에게 돌아간다는 점을, 국민이 자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국회에서 강경 대치 중인, ‘김건희 특검법’과 ‘故 채수근 상병’ 특검법 또한 마찬가지다.
민주당에서 조금만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故 채수근 상병’ 특검법은 대통령이 재의요구권을 행사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든지 그걸 무력화할 가능성이 높은 법안이다.
만일 ‘故 채수근 상병’ 특검법만 단독으로 의결했음에도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명분 때문에라도 야권은 모두 재의결에서 찬성표를 던질 것이고, 집권당 내부에서조차 반발 표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이재명의 민주당’에서, 의도적으로 국회·정국 파행을 획책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한다.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반 서민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두고, 민주당의 투쟁성을 높이 사는 동시에 대통령을 비난하겠지만, 실상은 받아들일 수 없는 걸 강요하는 ‘이재명의 민주당’이 문제일 수도 있다.
예전 16대 대통령 선거 당시 한나라당에서, 노무현 후보 장인의 남로당 전력을 문제 삼았던 적이 있다.
그때 노무현 후보가 한 말을 기억하고 또 인정한다면, 윤석열이 김건희 특검법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 또한 인정해야 하는 법이다.
김건희 특검법은, 윤석열 퇴임 후에도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 아닌가 말이다.
현 정치 부재(不在)의 시대가, 1990년 3당 야합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김대중 대통령과 평화민주당을 고립시키기 위해 노태우·김영삼·김종필 3인이 밀실 야합해서 3당 야합을 강행했고, 그로 인하여 여야 대치 정국은 감정적으로 심각하게 대립했었다.
하지만 여야의 이런 극한 대치 상황에서도, 정치 시스템은 제대로 굴러갔다.
단적으로 하나 예를 들자면, 당시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의 광주 MBC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광주 MBC 유튜브 채널 - 9월 15일 92년 대선 때 DJ와 깊은 정이 든 사연- 분량 중)
그 내용을 간략하게 언급하자면, 당시 민자당 김종호 원내총무가 노태우 정부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하는 관리형(?) 원내총무였던 탓에, 여야 원내총무 회담을 계속해 봐야 아무런 진척을 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민주당 원내총무였던 김정길 총무가 비밀리에 민자당 김영삼 대표 집을 방문했고, 김영삼 민자당 대표가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는, 국회 파행을 막아야 한다고 꼬드기면서 중재를 부탁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나는 이런 일련의 행위가, 제대로 된 정치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김영삼과 김정길의 관계는, 3당 야합 이후 절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불공대천지원수(不共戴天之怨讐) 사이라고 할 수도 있는 관계다.
3당 야합 이전까지만 해도 김영삼과 김정길은, 아주 사이가 좋은 고향 선후배 사이이자 두 양반의 선친들 또한 친구로 지내던 사이였다.
그런데 김영삼이 대권 욕심에 눈이 멀어 3당 야합을 결정하자, 누구보다 먼저 3당 야합 반대에 나선 사람이 김정길이었다.
그러니 김영삼 눈에, 김정길이 어찌 좋게 보이겠는가?
물론 두 사람 모두, 제각기 할 말은 있었을 것이다.
김정길로서는 김영삼이 야당 지지자를 배신한 자이고, 김영삼으로서는 예전부터 잘 알고 지내던 고향 후배란 놈이 자기를 배신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3당 야합 이후 얻어맞는 쪽은, 김정길일 수밖에 없다.
그 대표적인 예가 3당 야합 이후 시행된, 14대 국회의원 총선거다.
호남이 김대중 대통령의 텃밭이었듯이 부산은 누가 뭐라고 해도 김영삼의 텃밭이었고, 특히 김정길의 선거구인 부산 영도구는 거제 출신이 30%를 차지하는 지역이다.
김영삼이 가만히 있어도 거제 출신 사람들은 김정길을 배신자라 몰아붙이는 상황인데, 김영삼은 14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김정길을 떨어뜨리기 위해, 자그마치 세 차례나 영도를 찾아 영도 전역을 휘저었었다.
그만큼 김영삼 눈에 김정길은, 자신의 3당 야합 추진에 초를 친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여겼던 거다.
거기에다 김영삼·김정길 두 사람의 비밀 회동이 있었던 당시 김정길 처지는, 김영삼의 영원한 정적(政敵)이라 할 김대중의 대리인 격이지 않았던가?
그런데도 두 사람의 비밀 회동에서, 합의점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 크다.
정치는 그래야 하는 법이다.
겉으로는 끊임없이 격하게 대립하면서도, 호수의 오리가 물밑에서 끊임없이 물장구치듯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서로 주고받을 걸 따져가면서 타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 정치 현실은, 이런 정치적 거래나 타협하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아니 우리 국민이 보지 못하는 가운데, 윤석열과 이재명이 서로의 목숨 보전을 위해 밀약을 맺은 건지도 모른다.
현 정국을 냉정히 판단하자면 이재명이 무너지면 윤석열 또한 무너질 수밖에 없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 상황이 될 테니 말이다.
둘이 전부 정치를 외면하고 부도덕한 존재이기에, 국민이 딱히 손가락질하거나 잘한다고 손뼉을 칠 대상이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현 ‘이재명의 민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마치 1980년대 운동권 학생처럼, 서로 극한 대립을 보이면서 강경 발언을 쏟아내는 게, 정치의 전부라고 오판하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심지어 걸핏하면 끄집어내는 ‘탄핵’ 그리고 ‘탄핵’조차 부족해서 ‘계엄령’이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현 ‘이재명의 민주당’ 모습을 보면 한심하기조차 하다.
만일 지금이 1990년대나 2000년대 초반이라면, 계엄령 발동 또한 고려 대상이 될 수도 있다.
만일 윤석열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국민과 계엄령 선포의 전위에 나설 병사들이, 그 계엄령을 따라야 효과가 발생하는 법이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포한다고 해서, 그걸 곧이곧대로 따를 국민이 몇 명이나 될 것이며, 소위 MZ 세대라 불리는 병사들이 국민을 향해 총구를 겨누겠는가?
만일 윤석열 정권이 그런 미친 짓을 강행한다면, 병사들의 총구는 국민이 아닌 대통령실을 향하게 될 것이다.
장군을 목전에 둔 대령급이 아닌 영관급과 위관급 장교들조차, 합당하지 않은 명령에 절대복종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결국 현 ‘이재명의 민주당’에서 쏟아내는 말들은, 언젠가 ‘이재명의 민주당’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게 될 뿐이다.
정치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