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이, 어느덧 30대 후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20대부터 십수년간 경남에서 DJ를 지지하면서 온갖 고초와 수모를 겪으며 버틴 시간이었다. 새정치국민회의로 입당을 하면서 나는 중앙당 조직국으로 부름을 받았다. 1995년 겨울이었는데 1996년도 15대 총선이 있었기에 조직국에서 당직자로 있기보다 나는 현장으로 가야한다고 하면서 낙선될 것이 뻔한 험지인 창원에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를 하였다. 사실 중앙당 조직국에 계속 있었으면 향후 대선과정까지 중요 보직을 맡으면서 중앙정계로 진출할 수 있었는데 나는 계속 지역에서 한표라도 더 건져야겠다는 일념으로 다시 험지로 자원하여 내려간 것이다.
당시 나는 조직국 1부장이었는데 2,3부장까지 있었고 국장도 없었으니 사실상 실세였다. 그런데 내가 영남가서 또 싸운다고 그 자리를 내려놓고 다시 가시밭길로 간 것이었다. 나는 낙선될 줄 알았고 사실 이듬해 대선을 지역에서 미리 준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여긴 것이다. 당시는 TV토론은 없었고 합동유세만 했다. 나는 후보가 되어 유세를 하면서 내 이야기 하기 보다 광주 민주화 운동에서 피해를 입은 분들과 억울한 누명을 쓰고 평생 민주화를 이해 투신한 DJ의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내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경남 사람들은 광주에서 희생하신 분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누리는 민주화에 대한 열매는 그들의 희생위에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그렇게 유세를 하고 다니는데 하루는 한 아주머니가 나에게 와서 내 손을 잡구 눈물을 흘리며 너무도 고맙다고 하셨다. 그때 그 말한마디가 십수년간 지역에서 민주당으로 활동하며 DJ를 위해 헌신했던 것에 대해 인정을 받은 것 같아 감동이 되었다.
선거에서 나는 낙선하였다. 하지만 나 뿐 아니라 국민회의는 참패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당인 신한국당이 139석으로 46%를 가져가고 국민회의는 79석으로 27%정도를 가져간 것이다. 자민련이 50석을 가져가면서 3당으로 도약하게 되었다. 국민회의는 영남권에서 단 한석도 가져오지 못하였다.
이대로 정권창출은 요원해 보였다. 큰 위기감 속에서 우리는 곧바로 대선체제로 돌입하였다. 나는 지역위원장이 되어 대선을 위해 총력전을 벌였다.
지역에서도 최선을 다했지만 중앙정치의 큰 변화가 없었다면 DJ의 승리는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기적같이 97년 10월 자민련과 그 유명한 DJP 연합을 하기로 한 공동정부 운영에 합의하고 민정계의 수장인 박태준도 합류함으로 충청표와 보수로 부터 “빨갱이가 아님”을 분명하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당 후보였던 이인제가 경선에 불복하고 나와 국민신당을 창당하여 대선후보가 되어 여권표를 잠식하게 되었다. 그렇게 다시 3파전으로 진행된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1.5% 약 39만표 차이로 신승을 거두며 71년 이후 26년만에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그렇게 국민의 정부가 탄생하면서 나의 정치 여정의 클라이막스가 왔다.